큰나무 두 번째 이야기
큰나무 두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0.04.0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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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꽃이 봄비에 흠뻑 젖던 저녁 무렵 산그늘 속에서 부엉이 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택의 후문은 긴 통로 겸 창고로 이어지고 다시 차고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가파른 산과 이어진 이 넓지 않은 공간은 간간이 나에게 쉼을 제공하는 곳으로, 의자와 전기스토브가 놓여 있고 차를 마시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기도 한다. 봄비가 양철지붕을 두드리고 흙바닥을 토닥거리는 소리가 위로하는 소리처럼 정겹다. 하지만 여전히 한기를 품고 있어 전기스토브에 스위치를 돌리려는 순간 좁게 열린 출입문 틈을 비집고 낯선 형상이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서로가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서서히 낯선 형상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어찌할지를 몰라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치기로 일단 집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살며시 문을 열고 창고를 주시하니 이 낯선 손님은 스토브 가까운 위치의 선반 밑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있었다. 몇 걸음 다가가도 요동도 하지 않아 벽을 쿵쿵 소리가 나도록 두드려 보았지만,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려보고 다시 엎드린 자세 그대로였다. 분명 너구리였다. 등을 개선 충을 앓아 털이 빠져 있고 허기지고 지쳐 보였다. 갑자기 찾아든 손님을 위해 내가 할 일을 생각했다.

동물보호소에 연락을 취할까, 갈 때까지 모른 척할까. 우선 손님에게 먹을 것을 주기로 하고 식빵과 사과 한 개를 가져와 조각을 냈다. 손님에게 예를 갖추어 접시에 음식을 내야겠지만 예를 접고 식빵과 사과를 멀찍이서 손님에게 던져 주었다. 예의 없는 호스트를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은 고개만 길게 빼서 식빵을 입에 대기 시작하여 사과를 우적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빵부스러기가 몇 개와 작은 조각의 사과를 남기고 식사를 마감한 손님을 앓는 소리인지 코를 고는 소린지를 내며 깊은 잠이 들어갔다. 형광등 불을 끄고 방을 돌아왔지만, 손님이 궁금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빠끔히 창고 문을 열었다. 불빛에 잠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던 손님은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이젠 아예 죽은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버렸다. 아침 일찍 다시 손님을 살피러 가보니 손님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낮이 가고 밤이 오면서 괜스레 손님이 올 것 같은 기대감(?) 같은 것이 생겨 음식을 준비하여 누우셨던 곳에 놓아두었다. 긴 밤이 가고 아침이 다시 찾아들 무렵 손님방을 찾으니 음식은 부스러기조차 없이 다 사라졌고. 손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며칠을 기다렸지만, 손님은 다시 오지 않았다. 손님 대접이 소홀해서일까! 한두 번 더 보기를 원했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전 병든 들짐승처럼 초라한 모습인 나를 품어주신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기억난다. 은혜에 허기져 영혼을 채우기에 바빠 있었고 회복과 치유의 경험은 삶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평화가 찾아들고 통증이 달아난 자는 게을러지고 불만을 토로하고 은혜마저 취사선택하는 교만이 삶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삶은 온갖 핑계로 가득하고 복잡해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가 늘 함께 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기 위하여 내면을 살피지 못했고 껍데기뿐이 평안을 진실과 바꾸고도 태연한 내 모습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통증 없는 질고가 영혼을 잠식하고 거울 앞에선 나는 형편없이 초라해져 있었다.

나의 삶이 다시 은혜에 허기진 자처럼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봄비가 밤새 내리 모양이다.

봄비처럼 감사와 회개의 눈물도 함께 떨어져 영혼에 싹이 움트는 은혜의 밤이 깊게깊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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