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정 교수] 코로나19 사태 온라인 성찬에 대한 소고
[박해정 교수] 코로나19 사태 온라인 성찬에 대한 소고
  • KMC뉴스
  • 승인 2020.04.07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 기고는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학적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필자에게 부활절 성찬에 대한 질의가 빈번하여 이에 대한 답으로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글의 일부를 먼저 기고한다. 이 논문 전체는 2020년 여름 ‘신학과 세계’에 “온라인 예배에 대한 고찰”로 기고될 것이다.

박해정 (감리교신학대학교 예배학교수)

코로나19 위협으로 인한 초유의 교회 예배 중단 사태 속에서도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주일이 다가오고 있다. 예배학자로 동의하기 어렵지만, 일부 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으로 부활절 예배를 몇 주 연기하는 결정을 하는 상황이다. 부활주일은 개교회가 정할 수 없는 공교회의 약속 된 교회의 가장 큰 절기임에도 이를 연기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매년 부활주일마다 성찬을 시행했던 교회들은 성찬 시행에 대한 고민이 있다. 온라인 예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성찬을 꼭 해야만 하는가? 팬데믹(Pandemic) 상황에서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 UMC)는 온라인 성찬을 행하는 위험성에 대해서 안내하고 있다. 이미 연합감리교회에서는 2003년부터 온라인 성찬 시행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통해서 그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발표한 입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배 공동체의 모임이 제한적이게 되고, 더욱이 부활절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성찬의 시행에 대한 빈번한 문의가 연합감리교회 내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UMC 제자국(Board of Discipleship Ministries)은 2004년 총회의 결정을 상기시키며,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는 온라인 성찬에 대한 신학적 연구와 토의가 캔 카터(Ken Carter) 감독의 주재 하에 오랜 시간 동안 논의되었고, 논의에 참여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의견서를 작성하였다. 온라인 성찬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불가하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성찬은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 공동체성을 고양시키고, 그리스도와의 체현(Embodiment)이 실제적으로 그 공동체 내에 일어나야 하는 거룩한 성례이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온라인 성찬을 반대하는 견해가 있다. 웨슬리의 설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은총의 수단으로 가능한 여러 장소에서 항상 행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2004년 총회(General Conference)를 통해서 UMC는 ‘온라인 성찬은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없고,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부재하기에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결론을 내렸다. 온라인 성찬에 대한 대안으로 애찬식(Love Feast)을 제시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 제자국은 현 남감리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신학대학원 소속의 예배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스탬(Mark W. Stamm) 교수의 글, “Online Communion and the Covid-19 Crisis, Problems and Alternatives(코비드19 위기와 온라인 성찬, 문제와 대안)”을 소개하고 있다. 스탬은 온라인 성찬에 반대하면서 애찬식을 행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미 연합감리교회 총회를 통해서 온라인 성찬은 거부된 안이며, 아무리 오늘의 상황이 특별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온라인 성찬을 한시적으로만 허락한다는 것은 더 많은 신학적 오류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팬데믹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다시 온라인 성찬을 불허한다는 것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에 그는 웨슬리에 의해서 회복된 초대교회의 아가페 식사의 전통인 애찬식을 통해서 성찬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찬을 통해서 성찬의 신비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애찬이 성찬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찬은 애찬으로서의 기능과 역할, 또한 그 목회적 결실들이 있다. 비록 성찬을 할 수 없는 18세기 영국 교회에서 웨슬리가 선택한 것이 애찬이지만, 오늘의 상황은 성찬을 할 수 있는 선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찬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스탬의 주장은 가정예배로 주일 예배를 대신하는 경우는 그나마 애찬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마저도 주일 예배를 가정 단위로 예배를 드린 후에 이어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기에 이 또한 적절한 대안으로 보기에 어렵겠다.

스탬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에 주목하면서, “이를 행하여”라는 것은 11장 33절에 있는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를 강조하며, 함께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온라인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오는 결론이다. 이미 온라인 예배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이미 지금의 교회는 온라인을 통해서 예배 공동체로 함께 예배하고 있는 상황인 것을 인식해야 된다. 온라인을 통해서 공동체성은 이미 형성되어 있다.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체현(Embodiment)은 수찬자의 적극적인 참여로 충분히 경험될 수 있다.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신비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수찬자의 소망을 통해서 경험된다.

온라인 성찬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제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웨슬리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입장에 견주어 볼 때 성찬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제한적 상황에서 성찬을 더욱 장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고립과 단절을 연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일수록 비록 온라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아무도 단절될 수 없는 모두가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식탁에 올 수 있도록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성도들을 초대해야 된다. 교회는 성찬의 거룩한 신비를 위한 부활의 식탁을 제공해야 된다.

은총의 수단으로 성찬을 이해한 웨슬리는 지속적인 성찬의 의무(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를 통해서 감리교인이 성찬을 대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을 가르치고 있다. 성찬을 수행함에 있어서 핑계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성찬을 행하면 예배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 ‘자주 행하면 그 의미가 희석된다.’는 것들은 다 변명들이라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거룩한 신비의 식탁이 우리 앞에 있기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

온라인 성찬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어렵지 않다. 어색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문은 『새 예배서』에 수록되어 있는 부활주일 성찬 예문을 사용하면 된다. 오히려 시간이 길게 걸리지 않기에 성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성찬의 신학적 의미가 이미 『새 예배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준비된 빵과 포도주를 직접 전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성찬에 함께 참여하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먹고 마실 빵과 포도주 혹은 포도주스를 각 가정에서 준비할 수도 있다. 각 가정에서 성찬에 사용할 빵과 음료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성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할 수도 있다. 온라인 예배의 시작이 되기 전에 이미 각 가정은 성찬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기에,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사뭇 다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이유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우리의 예배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함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