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90주년 제79회 중부연회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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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길극
  • 승인 2020.04.0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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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기범 목사 100 주기추모예배와 108년 만에 복권추진

- 김기범의 한국감리교회 목회자의 자긍심과 항일독립운동 - 

제물포웨슬리예배당, 2020년 3월27일(금)오전11시, 故 김기범목사 100주기추모예배 (촬영 이길극 목사)
故 金箕範 牧師(고 김기범 목사) 김기범 한국 개신교회 최초목사

<1> 김기범목사 100주기 추모예배순서 진행

강재관 기획목사의 예식사 시작으로 488장(이 몸의 소망 무언가) 찬송, 이일곤 목사 기도, 빌립보서 3:20∼21 허정 목사 봉독, 약력소개 이길극 목사, 설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김흥규 담임목사, 인사말씀 연회총무 조인현 목사, 추도사 인천서지방 김교석 감리사, 480장(천국에서 만나보자) 찬송, 연회기념사업위원장 손인선 감리사 축도로 추모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어서 김흥규 담임목사가 유족과 참석자들을 소개하고 김제준 장로가 유족대표로 인사하였다. 현재 바이러스로 인한 국가적 재난에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서 유족과 교회와 연회를 배려하여 최소한의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추모(追慕)예배 참석자 유가족 : 김제준 장로, 김민자 권사 / 김인환 집사 / 김민희 성도 내리교회 : 김흥규 담임목사, 이경숙 사모, 최영호 목사, 강재관 목사, 안성헌 목사, 강주현 목사, 이일곤 목사, 허정 목사, 박정윤 전도사, 홍금순 전도사, 김명희 전도사, 김순자 전도사, 홍미향 전도사, 김한청 장로, 이현준 장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90주년 제79회 중부연회 기념사업위원회 : 조인현 연회총무, 김교석 감리사, 손인선 감리사(위원장), 이길극 목사, 나선호 목사, 문영배 장로(참석자들은 마스크를 벗고 사진 촬영)

2020년 3월 27일(금), 오전11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故김기범목사100주기추모예배

† 故 김기범(金箕範) 목사(牧師) 약력(略歷)

•1869. 8. 13, 황해도 연안군 해룡면 금천리 출생
•1889. 내리교회(제물포교회) 초대교인으로 아펜젤러선교사와 사역
•1896. 스크랜턴 선교사로부터 제물포교회 본처전도사 직첩
•1896. 9. 애국충군 자작시 ‘고종임금 경축가’를 교인들과 노래
•1897. 5. 한국 최초 청년회 감리교회 엡웟청년회 총찰위원, 존스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교회 나인드(Ninde) 엡웟청년회 조직
•1898. 8. 제14회 조선선교회(연회) 자전적 보고
①1년 동안 최대 2천리 순회전도
②내리교회(제물포 용동 웨슬리교회/우각동 에즈베리교회) 담임목사와 번차 설교
③담방리(현 만수동), 부평, 김포, 강화, 영종 등 지역 전도
④제14회 연회에서 원산교회 파송, 3년간 전도
•1901. 5. 14, 상동교회, 제17회 조선선교회, 무어 감독 집례, 스크랜턴, 존스, 노블 선교사 보좌. 한국인 최초목사 김기범 김창식 안수 / 황해도 연안교회 담임(~1903)
•1903. 5. 내리교회 담임(~1905, 1907~1910) / 1904년 연회에서 한국감리교회 중 최우수교회 대부흥 목회로 평가받음 / 영화학교 사립인가를 받음
•1904. 콜린스의 후원으로 영화남학교 건물 신축
•1907. 교회 뜰에서 항일독립을 위한 영화학교 남학생 집총군사훈련
•1908. 3. 나인드 엡웟청년회 자체 재조직하여 애국항일 독립운동
•1910. 평안남도 삼화(진남포)교회 담임(~1912)
•1920. 3. 27, 제물포 싸리재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받음, 3. 31 오전 10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에서 장례식, 수봉산 내리 동산에 안장(~1972)
•1999. 5. 검단 왕길동 내리 부활의 동산으로 이장
•2020. 3. 27, 인천시 서구 왕길동 130-1, 검단 내리 부활의 동산에 안식 100주기

1905년 내리교회, 케이블선교사 – 북감리교회 기이부(E.M. Cable) 선교사- 김기범목사 - 남감리교회 도이명(C.S. Deming)선교사

<2> 한국 개신교회의 처음 어른 김기범 목사

(1) 영적 지적 열정의 생각있는 목회자 김기범

<1898년>

1898년 9월 7일, 아펜젤러가 사장으로 있던 ‘대한크리스도인 회보’의 김기범 열정적인 전도보고이다. 제14회 조선선교회 8월 보단(보고).

『 저는 작년 연환회에서 본처 전도인 표지를 받은 후 목사 조원시(존스)씨의 교훈을 받어 전도하였는데, 우각동교회와 용동(내리)교회에서 주일마다 목사와 번차대로 전도하였으되 십오삭 동안 오십 주일은 본처에서 전도하고, 병 있는 교우를 찾아가서 기도하였사옵고, 별세한 교우 집 장사에 목사를 대신하야 가서 교중 예대로 두 번을 행하였사오며 외처에 다니며 전도하기는 동으로 이십리 되는 담방리(만수동) 촌에 다섯 번 가서 전하였사오며, 서으로 이십리 되는 영종 섬에 두 번가서 전하였사오며 동북간으로 사십리 되는 부평 김포 등지에 네 번 가서 전하였사오며, 북으로 일백사십리 되는 강화 등지에 다섯 번 가서 전하였는데 외처에 전도하러 십륙 차 내왕에 전도 말을 들은 사람은 륙백육십삼인 이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참 감사하옵나이다. 』

<1902년 순직하던 해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김기범에 대한 보고>

『 다양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작년에 안수를 받은 두 번째(:김창식과 함께 처음 목사안수 받음) 사람 김기범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 제일 신사적이고 온유한 사람이다. 그는 10년 전에 제물포에서 살았다. 제물포교회 예배는 당시 서울에 사는 선교사가 인도했다. 그해 연말에 선교사의 수고로 눈에 보이는 결과는 오직 김기범 한 사람뿐으로 학습인 반열에 이 사람 이름을 올렸다. 그는 병이 들었을 때 ‘내가 이 병에서 낫게 되던지 낫지 않든지 나는 이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선교사가 제물포에 주재하려 이주하였을 때, 이 사람은 특별한 주목을 받았으며, 그는 곧 신실한 제자로 발전하였다. 제물포에서, 원산에서, 황해도에서 그는 완벽한 목회를 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

<1901년>

김기범은 김창식과 함께 제17회 조선선교회 1901년 5월 14일(화) 오후2시 서울 상동교회에서 한국 개신교회 최초 목사가 되었다. 무어 감독이 목사안수 집례, 스크랜턴, 존스, 노블 선교사가 보좌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초대 선교사로서 이 뜻깊은 토착민 목사안수(Deacon 집사 목사, 준회원) 첫 열매를 맺는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안식년이 되어 신학교설립 등 업무추진 으로 미국에 있었다. 아펜젤러에게는 최병헌 노블에게는 김창식 존스에게는 김기범 스크랜턴에게는 이은승이 있었다. 이은승은 이유 없이 목사 안수를 미루었고 최병헌은 집안초상으로 목사 안수를 미룬다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스크랜턴에게는 상동교회 예배당이 신축봉헌예배 겸 연회를 개회할 장소가 되었다. 노블의 김창식과 존스의 김기범 두 분이 목사 안수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1902년 5월 제18회 조선선교회 연회가 열린 평양 남산현교회 예배당에서 최병헌 목사안수례를 보좌하였고 한 달 후 1902년 6월 11일 순직하였다. 이은승은 1903년 5월 제19회 연회,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에서 목사안수례를 받았다. 신학회 1901년 1월 졸업생은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 이은승 네 분이었다. 김창식 김기범은 1901년에 최병헌은 1902년에 이은승은 1903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김기범은 1901년 5월 제17회 연회에서 자신의 고향 황해도 연안교회로 파송을 받아 3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한다.

<1905년>

1903년 존스 선교사가 하와이 이민 주선 후에 안식년 관계로 내리교회 담임자 자리를 비우게 된다. 이어서 김기범이 1903년 내리교회로 파송 받아 담임자가 된다. 1904년 연회에서 한국감리교회서 최우수교회라는 격찬을 받은 열정적 목회를 하였다. 더불어 영화학교 사립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유족의 이야기로 1905년(위 사진) 들어서 열정적이고 생각 깊은 김기범의 폐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김기범은 요양을 위하여 선교사에게 안식년 유급휴가를 요청하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안식년 유급휴가였기에 한국인 목사들에게도 차별없는 동등한 처우를 기대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입을 떼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계속 유급휴가를 요청하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김기범은 말하였었다. 일본주재 선교사 출신 친일 감독 해리스가 이미 1904년부터 한국 감리교회를 주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1905년 한국 토착민 목회자 안식년 유급휴가 요청은 결국 묵살되었다.

이 사태는 한국인으로서 선임목회자가 된 자신의 문제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배출될 한국인 목사들과 선교사들과의 차별 없는 처우개선 문제이기도 한 것인데, 소위 지도층 선교사들에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마디 하였고 행동으로 표시하게 되었다. ‘ 우리 한국인 목회자들도 안식년 유급휴가를 달라 ! ’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놀랄 만한 돌출언동으로 보였을 것이고 선교사들이 곱게 볼 리 없었다.

1905년 6월 김기범이 자진 휴직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황해도 연안항 부두에 그의 소작인 200여명이 환영 나왔을 정도로 김기범은 보부상으로도 재력있는 부농이었다. 유급휴가 요청은 요양비의 재정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인 목회자의 자긍심과 차별없는 동등한 처우를 주장한 일이었다. 추후에 김기범의 장남 김태진이 미국 유학할 때에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재정 회계일 도왔으며 후원에 연관이 있을 정도로 재정이 든든하였다. 하지만 그의 심저에는 한국인 처음 어른 목사로서 자긍심이 깊게 훼손된 상처가 쓰렸다. 거기다가 을사늑약까지 터졌으니 우울증과 상실감이 김기범에게 생기지 않았다면 남들 보기에 오히려 이상하였을 것이다.

<1906>

<제물포웨슬리교회>ARM 미감리회연회록, June 1906, Korean Mission Conference
『 김기범의 유급 휴가 요구가 선교사들에게 실망감을 주었고, 김기범은 교회 사역을 1년간 휴직하였다. 그는 만성 우울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보였는데.....

더군다나 (: 1905년 을사늑약으로)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사력 증강으로 부지를 무단 사용이 심해졌다. 일본군은 많은 기독교인들 가정의 재산들을 강탈하였다. (제물포 주민들에게) 이것은 정신적 강압과 총제적 의기소침이었다. 하지만 교인들은 그 1년간 전도되어 더 증가되었다. 주일평균 500명. 새 교인들이 교회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교회 요청에 따라 성경공부 과정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였다. 큰 흥미를 가지고 그 과정을 따라오고 있다. 』

1905년 김기범 휴직 전후의 교회 안팎 분위기는 교회나 국가가 침울할 뿐 아니라 의기소침 사태들의 연속 발생이었다. 무엇보다도 1901년 김기범과 김창식이 한국 최초목사가 되어 굉장한 자긍심과 고양된 열성이 있었으나 이들을 앞서 지도해주던 아펜젤러가 1902년 6월 11일 순직하게 되는데, 이 사태는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사기하락뿐만 아니라 한국인 지도자들 역시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어졌다. 바로 1년 전에는 친일파 해리스가 1904년 한국을 관할하는 감독이 된 일이 있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로나 한국은 일제의 강점지배 하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907년>

1907년 6월 김기범은 자진 휴직에서 교회로 돌아오긴 했는데 1907년 6월 22일 연회에서 김기범을 제외한 김창식 이은승 그리고 최병헌 전덕기 강인걸 손승용 이익모 홍승하 장락도 김창규 권신일 김우권 목사가 미국 선교사들의 감리교회에 한국인 정회원으로 받아졌다.

1907년 6월 고종 헤이그밀사 불발, 7월 고종 강제양위. 1907년 8월 1일 구한국군 강제해산과 정미의병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기범이 복직하자 나인데 웹웟청년회 회원이었으며 교회 유지로서 제물포 항내 미곡상이던 박삼홍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통분히 여기고 자비로 총기를 구입하고 고적대를 준비하였다. 1907년(위 사진) 내리교회 뜰에서는 영화학교 남학생들이 군사훈련에 돌입한다. 상동교회의 전덕기와 교분이 있는 강제해산된 구한국군 출신 이필주에게 집총훈련과 체육훈련교사 활동을 맡겼다. 이필주는 1919 기미년 3•1독립만세 민족대표 33인 중에 1인이 될 인물이었다.

1906년 6월 13일 연회에서 엡웟청년회가 정치적 활동을 빌미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교회로 돌아온 김기범은 1908년 3월 나인드엡웟청년회도 자체적 재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시켰다. 그러니 그의 정신이 남들이 보는 그런 우울증이라든지 미친 사람 같다든지 등은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탄 1910년 해리스 감독은 김기범을 내리교회에서 평안남도 진남포교회로 파송하면서 교계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그 영향권 밖으로 그리고 점차 감리교회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1912년>

그 뒤 2년 후 김기범은 1912년 3월 5일, 상동교회, 제5회 조선예수교감리회 년회. 해리스 감독 사회로 년회과정ᄉᆞ실(자격)위원회 : 셔원보 모리시 대이오 번조진 로보을 백셰암 긔이부 로퇴인 백아덕 으릐벗 10명 위원의 합의로 김기범 제명을 결정하였다. 김기범은 한국인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친일 감독의 회무처리로 할명되었다.

김기범 보다 23살 나이가 더 들은 친일 해리스 감독(66세)과 재한 선교사들의 하늘과 같은 권세 앞에서 김기범(43세)을 옹호해 줄 사람이 있었을까. 그 자리는 피와 눈물과 땀 흘리는 시공이었다. 선배가 그것도 최초한국인 목사 김기범이 할명되는 그 자리에 후배 한국인 목사들은 보고 있어만 하였다. 상동예배당에서 기쁨으로 목사안수를 받았고 다시 상동예배당에서 자긍심 가득한 고통 중에 할명되었다. 한국감리교회 처음 목사이면서 한국감리교회 후진의 미래를 위하여 필요한 말을 꼭 하고만 그리고 국가 회복을 위하여 독립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감리교회 어른이 일제강점기에 제명당한 것이다.

1907년, 김기범목사 담임 내리교회, 제물포웨슬리예배당-영화남학교.집총고적대

(2) 근대초기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지도자로서 김기범목사

김기범은 한국 엡웟청년회 창립임원으로 총찰위원이었으며 내리교회 나인드 웹웟청년회 지도자로서 인천지역 근대 초기 독립운동 충군애국 지사였다. 엡웟청년회(Epworth, 의법懿法靑年會)는 교회 안의 신앙과 사회 속에서 계몽교육봉사를 목적하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엡웟청년회는 한국 사회에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갔다.

1897년 5월 제13회 조선선교회 때에 조이스 감독이 이 청년회를 창립할 당시 총무가 존스였다. 김기범이 학문국장 담당. 한국전체 웹웟청년회 총찰위원으로 활약.

존스는 내리교회 담임목사로서 총찰위원 김기범 본처전도사와 함께 동년 1897년 6월 경에 내리교회 나인드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나인드 감독은 2년전 1895년 2월에 내리교회 여성전용예배당 봉헌차 내리교회에 참석하였으며 1895년 조선선교회를 주재한 감독으로서 당시 미국 엡웟청년회 회장이었다. 교회마다 청년회 앞에 내한 미국감독 이름을 붙였다. 상동교회는 말랄류청년회(1897년 9월 5일)와 해리스여자청년회(1904), 평양 남산현교회는 굿셀청년회(1897년 9월21일), 정동교회는 1897년10월31일 워렌청년회와 조이스여자청년회, 1901-1902년 사이에 강화지방 무어청년회 등이 웹웟청년회 초기 조직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터지자 전국 엡웟청년회가 즉시 모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 무효상소운동’을 대한문 앞에서 도끼를 메고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들 중 일부 회원들은 ‘을사5적 처결’을 위한 무장세력 양성을 목적하였다. 1906년 2월 서울에 일제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미 1904년에 일본과 한국감리교회 관리감독이 된 친일파 해리스(M.C. Harris)와 그 지휘하의 선교사들은 1906년 6월 13일 연회에서 엡웟청년회를 정치적 활동을 빌미로 해산하였다. 하지만 웹웟청년회 지도자 김기범은 안식년 유급휴가요청묵살 사태의 자진 휴직에서 1907년 내리교회에 다시 돌아온 이듬해 1908년 3월 교회 자체적으로 나인드 웹웟청년회를 재조직하였다.

친일 해리스는 미국 감리교회의 일본 개척선교사로 27살에 1873년 홋카이도 하코다테 선교 이후 도쿄와 미국 서부연안 이주일본인과 친교를 하였다. 30여 년간 일본인 선교 후 1904년 미감리회 총회에서 한국과 일본 동시 선교감독으로 피선되어 1916년 은퇴하기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885년 일본 선교 중인 해리스(37세)가 아펜젤러(27세)와 스크랜턴(29세) 선교사 일행을 제일먼저 요코하마에서 영접하였던 일본 선교사였으며 1907년에는 스크랜턴을 사직하게 만든 감독이었다. 스크랜턴은 한국을 방문한 해리스 감독의 행보를 경험한 후에 ‘감독은 극친일파(The bishop is pro and ultra Japanese.)다.' 라고 1905년 5월 15일 그의 편지에서 비평하였다.

<3> 삶의 터전에서 소외되면서도 끝까지 소임을 다한 김기범

김기범은 한국 토착 목회자 자긍심의 뿌리로서 안식년 유급휴가 요청으로 선교사들에게 칭원을 샀었으며 독립운동 웹웟청년회의 지도자로서 일제 강점시 친일파 감독과 재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할명(제명)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당하였다.

(1) 1905년 한국인 목회자의 안식년 유급휴가를 끊임없이 청원하여 묵살되어 연회가 아닌 자의로 휴직으로 선교사들의 칭원을 산 일.
(2) 1906년 강제 해산 된 나인드웹웻청년회를 1908년에 자체적 재조직한 항일운동 등은 급기야 1912년 3월 5일, 선교사들 중심의 교역자과정ᄉᆞ실(자격)위원회를 통하여 해리스 감독이 김기범을 할명하였다.

그 뒤로 김기범은 옹진 도서와 연안지역 선교 활동 중에 출몰하는 해적의 화살에 어깨에 맞아 병이 되어 제물포 싸리재 자택에서 투병하였다. 그의 마음과 몸이 함께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 그가 애국충군 사역으로 기도하였던 고종 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일제 독살에 승하하였고 1여년 후 김기범이 1920년 3월 27일 제물포 싸리재 자택에서 소천하였다(52세). 그가 담임하였던 내리교회 제물포웨슬리예배당에서 3월 31일 오전10시에 그의 장례식이 있었다.

집례자는 김진호 전도사(48세)였는데 1919년 이필주목사를 도와서 삼일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일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3월에 내리교회에 부임하였으며 동년 10월24일에 웰치 감독 집례로 목사(Deacon Pastor)안수를 받았다.

<4> 100주기추모와 108년만의 중부연회 회기 중에서 복권 추진

선교50주년 되던 1934년에 이르기까지 22년 간 김기범의 행적에 대하여 기술하지 않던 자치 4년된 한국감리교회에서는 김기범을 ‘우리 교회의 원로’라고 등등 간략하게 기술한 1934년은 일제강점시대였다. 과연 어떤 누가 할명된 김기범을 거명하여서 좋아할 자들 있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1) 올해 2020년 2월 27일(목) 오전11시 중부연회본부에서 모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90주년기념 제79회 중부연회 준비위원회 및 기념준비위원회’에서 필자는 위 김기범 관련 역사적 기록을 설명하고 ‘ 김기범 목사 복권과 명예회복’을 발의하였으며 관련된 기념준비위원회는 개회될 2020년 제79회 중부연회 회기 중에 이 안건을 중부연회 과정자격위원회를 거쳐 상정하기로 위 위원회가 결의하였다.

(2) 3월 23일, 인천일보(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9537) 【한국개신교 아버지 김기범목사 서거100주기】에 필자는 서면으로 김기범목사 복권 명예회복에 관하여 인터뷰하였고 3월 26일(목) 오후, 김기범목사100주기추모예배를 하루 앞두고 왈길동 검단에 가서 그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3) 3월 27일(금) 오전 11시, 김기범이 담임하였던 내리교회의 복원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에서 5대 손을 비롯한 유족들과 내리교회 교역자들과 인천서지방 감리사 그리고 중부연회 관계자들이 현 바이러스재난에 따른 사회적 거리를 생각하여 최소한의 참석자들로‘ 김기범목사100주기 추모예배’를 드렸다. 예배순서 인사말에서 중부연회 관계자는 복권에 필요한 과정을 거쳐서 2020년 중부연회에 상정하여 연회에서 복권을 결의하여 유족들과 연회원들 앞에서 명예회복을 해드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감리교회와 한국사회 발전에 지대한 역사 공헌의 인프라였고 김기범이 담임하였던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1901년 12월 25일 신축 입당하여 54년간 예배당으로 사용되던 중에 교인 증가로 인한 교회확장을 위하여 1955년 9월 멸실되었다가 57년 지난 2012년 9월에 복원 헌당되었다. 우리나라 광복 올해로 75년이 되었고 그동안 애국애족의 독립유공자들은 대거 복권되었으나 108년 전 1912년 3월 일제강점시기에 충군애국의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최초 한국감리교회 목사 김기범은 (할명=제명)된 상태로 잠들어 있으니 그는 반드시 복권되어 명예회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인천지역 근대 초기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서될만하다고 생각된다. (기술 : 이길극 2020.3.30.)

1920.3.31. 오전10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故 김기범목사 장례식, 사진 중앙 : 집례 독립운동가 김진호 전도사 사진 오른쪽 검정양복: 김기범 목사의 장남 김태진
1920. 3. 31, 오후, 故 김기범 목사 장례운구 싸리재 맨앞 : 김진호 전도사
1920.3.31, 오후 김기범 목사 장지. 인천 수봉산 내리동산

 

1991.9.22, 김기범 목사 옛 묘비, 검단 부활의 동산

 

김기범 목사 묘비, 검단 부활의 동산, 현재, 인천 서구 왕길동 130-1

 

사진왼쪽: 김기범목사 장남 김태진 가운데: 도산 안창호
고 김기범목사, ‘우리 교회 원로’ 감리교회.선교50주년,감리회보.제2권(10쪽),193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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