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 ‘오래된 일’ ㅡ 바이러스와 교회
허수경의 시 ‘오래된 일’ ㅡ 바이러스와 교회
  • KMC뉴스
  • 승인 2020.03.2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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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ㅡ 허수경의 시 ‘오래된 일’ 부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팬데믹 현상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패스트 팬데믹과 1차대전 당시 스페인 독감이 있다. 그 팬데믹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에는 사스와 메르스 팬데믹이 있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외쳤던 이상화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 온 세상을 뒤덮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보면 뭐라고 시를 쓸까? 겨우내 오지 않던 비가 요 며칠 끊이지 않고 왔다. ‘자택연금’ 행정 명령이 내려진 상태라 길거리에 눈에 띄게 자동차 행렬이 줄었고, 비가 내려와 하늘의 먼지를 씻어준 덕분인지, 공기가 확연히 좋아졌다. 게다가 바이러스 팩데믹 때문에 죽어 있는 인간 세상의 모습과는 달리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은 제각기 꽃을 피워내고 있고, 산등성이는 초록색 풀로 뒤덮이고 있다.

하늘이 맑으니 뭉게구름도 새옷을 입은 양 깔끔하다. 바이러스의 팬데믹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짓이 힘차고 그네들의 지저귐은 청아하다. 무엇이 평화인지 헷갈린다. 경제가 돌아가지 않으니 세상은 평화를 잃었다고, 연일 방송에서는 떠들어대나, 자연은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과학이 발전되기 전,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은 그저 신비한 죽음이었다. 그 누구도 죽어가는 사람이 왜 죽어가는 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시간 속에 살던 사람들은 그 신비를 풀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중세, 페스트가 돌고 있을 때 교회는 적극 나서서 사람들에게 그 신비를 알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중세의 교회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성수(聖水)를 뿌려대며 치료의식을 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에서 낫지 않았고, 교회에 모인 군중들은 원인도 모르는 채 페스트에 감염되어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바이러스는 전염병이다. 바이러스는 대면 접촉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러므로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예방은 대면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이것을 몰랐다. 그들은 치료의식을 행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 행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페스트 전염을 더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그 결과,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그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 있으나 죽은 것처럼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중세교회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교회의 치료의식이 거짓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모든 죽음이 살아나던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교회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중세적인 마인드로 바이러스 팬데믹에 대처한 교회는 중세교회와 같이 몰락할 것이지만, ‘이성과 공공신학적 마인드(이웃과 상식을 함께 공유하는 교회)’로 대처한 교회는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살아나던 척하던 중세교회’와는 달리 실제로 살아날 것이다.

살아 있는 척하지 말고, 진실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 그리하여,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봄날, 그 모든 죽음을 끌어안고, 그 모든 죽음보다 먼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부활절에는 모든 것이 부활하게 되기를!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세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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