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의 심사(?)를 받는 목회자
교인의 심사(?)를 받는 목회자
  • 민돈원
  • 승인 2019.11.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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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2018.9.20일자) 서울에 소재한 꽤 규모 있는 교회의 후임 담임자 구인 광고를 감리회 홈피에서 본 적이 있다. 그 교회는 직전 담임자가 감독을 역임한 교회였다. 감리회 게시판과 지상에 공개모집한 내용 중 지원자격 내용이 특이하여서 그대로 복사해 두었던 글을 1년이 지난 오늘 소개한다.

<지원 자격>

가. 교리와 장정 상 초빙에 결격사유가 없는 목사로서 감리교 설립이념을 실천하며 교회 발 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

나. 학력- 감리교회가 인정하는 신학대학, 대학원 졸업

다. 인품과 영적 지도력이 있으신 분

라. 정치 등에 관여하지 않고 목회만 전념하는 분 <이하 생략>

위 내용 4가지 자격중 앞의 3가지는 어느 교회나 그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조항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기에 거북스럽지 않게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라항의 마지막 지원자격 기준은 매우 의외였다. 왠지 부자연스럽다 못해 껄끄럽기만 하다. 아마도 이 대목을 읽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느끼는 감정이 누구라도 ‘아! 그 교회는 전임자가 교단 정치에 지나치게 활동하다보니 교회로서는 덕이 되지 않았구나!’ 라고 하는 마음을 금세 떨쳐 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정치’라는 용어는 교단정치에 비중이 있는 것 같지만 더 나아가 세상 정치도 배제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이런 기준을 제시하게 된 동기는 그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겪어본 뚜렷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설사 그 외 여타 교회 역시 후임자 초빙을 할 때 이런 내용을 기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건강한 교회내지는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런 자원자격의 문구는 비단 이 교회만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흔히 그렇듯이 사회에서 높은 권력이나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목회현장을 접하면서 목회자들이 갖는 유혹 역시 의외로 사회와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절감하게 된다. 그중의 하나가 교권을 잡기위해 인맥, 학연 등 계파 형성한 줄서기 내지는 줄 세우기이다. 이에 어느 라인에 서느냐에 따라 주류가 되고 비주류가 될 수가 있다. 이런 방면에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중에는 감리회 감독회장을 감리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런가 하면 마치 경찰조직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경찰의 꽃이 총경이다’라고 부르듯이 ‘감리사 되는 것도 감리회의 꽃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남발하는 자들의 멘탈은 책임이나 짐보다는 화려함과 대단한 지위상승으로 착각한 나머지 목회자 세계에 옥상옥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결과 서열을 매겨 교단 안에, 나아가 한국교회 안에 평화를 만들어 가기보다 온갖 좋은 구호는 제창하면서도 실제로는 평화를 위장한 갈등구조로 스스로의 분쟁과 자가당착에 빠져 순환되는 제도권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불편한 현실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어느 교회 담임자 문제로 인사이동하는 일에 관여하면서 지원자로부터 부끄러운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목회자 자리가 이런 지경까지 훼손되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지인 목사님이 그 교회 교인들이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내용중에 어느 교인이 ‘목사님은 공예배(주일낮, 밤, 수요)를 드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새벽기도회는 항상 드립니까? 새벽기도회 때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귀를 의심할 정도의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해야 할 질문을 어떻게 된 일인지 교인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서 담임자 지원하는 목회자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했다 하니 막장드라마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작금의 교회는 누가 목회자의 권위를 무너뜨리기보다 우리 목회자 스스로가 이런 저런 떳떳치 못한 부끄러운 일로 인하여 자체정화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에 주님의 교회를 잘 세우라고 주신 그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들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애통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리고 내면의 양심이라는 거울앞에 한 점 숨김없이 냉정하게 비추어 속히 은혜의 합리화라는 틀 속에 가두어 놓은 허상들에 대해 엄중한 메스를 가하여 온갖 위선으로 포장된 허위의식을 도려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은과 금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는 감리회와 한국교회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만이 다시 교회와 이 어둔 세상에 새로운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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