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우표풍(驟雨飄風)
취우표풍(驟雨飄風)
  • 곽일석
  • 승인 2019.10.1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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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우표풍(驟雨飄風), 소나기처럼 휘몰아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지다...

취우표풍(驟雨飄風)은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紀)'에 나오는 말로, 소나기처럼 권력을 휘몰아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진 홍국영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말로 회자됩니다.

1776년 정조가 보위에 오르자 권력이 모두 홍국영(洪國榮·1748~1781)에게서 나왔습니다. 29세의 그는 도승지와 훈련대장에 금위대장까지 겸직했습니다. 집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대궐에서 생활했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는 날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거리에 늘어서고 집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홍국영이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소낙비[驟雨]처럼 몰려오는 겐가?" 한 무변(武弁)이 대답했습니다. "나리께서 회오리바람[飄風]처럼 가시기 때문입지요." 홍국영이 껄껄 웃으며 대구를 잘 맞췄다고 칭찬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3년 뒤에 실각했습니다. 정조는 그에게 지금의 연세대학교 뒤편 홍보동(紅寶洞)에 집을 하사했습니다. 그는 한겨울에 숯불을 피워가며 으리으리한 집을 지었습니다. 낙성식에는 조정 대신이 다 달려가서 축하했습니다. 집 이름을 취은루(醉恩樓)라 지었습니다. 임금의 은혜에 취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숙위소에 보관했던 물건을 새집으로 옮겨올 때 장정 30~40명이 동원되어 10여일을 날라야만 했습니다. 돈이 5만 냥에 패도(佩刀)가 3,000자루, 쥘부채만 1만 자루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에게 내쳐진 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둥대며 안절부절못했습니다. 혼잣말로 "아무개는 죽여야 하고, 아무개는 주리를 틀어야 한다"고 중얼댔습니다. 결국은 그 좋은 집에서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강릉으로 쫓겨 갔습니다.

서울서 편지가 오면 반가워 뜯었다가 이내 찢고 돌아누워 엉엉 울었습니다. 길 가던 무지렁이 백성을 붙들고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듣던 이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면 손으로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결국은 1년 만에 죽어 달구지에 실려와 경기도 고양 땅에 묻혔습니다. 영정에 은마도사(恩麻道士)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은마는 임금이 벼슬을 임명할 때 내리는 조서를 말하는데, 그는 권력에 도취하고 은혜에 취해 취은루를 짓고, 은마의 추억을 곱씹다 죽었습니다.


지난 10여년 감리교 사태의 혼돈스런 상황 속에서 두드러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감리교100만전도 본부장, 선교국 부총무를 거쳐서 사무국 총무로 선출된 지학수 목사입니다.

전감목에서 활동하다가 전용재 감독회장 당선무효소송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후 감리교사태를 정리하여 선거백서 등을 만들고 바른감독선거협의회 총무로 활동하다가 전명구 목사에 의해 발탁되었습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의 최측근으로 감리교회의 권력의 중심에 커다란 둥지를 틀었습니다. 명실공히 감리회 본부의 최고 실세로 자리하면서, 소위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사무국 총무와 행정실장 직무대리를 겸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를 또다시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는 10월 25일, 전명구 감독회장 선거무효 항소심의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행보를 살피건대 감리교회의 정치의 향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서 충심으로 바라기는 지학수 목사가 이 지점에서 마땅히 행할 일은, 무엇보다 겸손히 향방을 잘 구별하여 바른 길로 행하되, 이전에 함께 고민하며 꿈꾸었던 감리교 개혁이라는 시대적 목표를 뒤늦게라도 이루어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원천교회

곽일석 목사(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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