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순교자)처럼 믿어라!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순교자)처럼 믿어라!
  • 김오채
  • 승인 2019.10.0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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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전국연합회 임원연수단 – 순교지(천곡교회) 탐방

교회학교전국연합회 임원연수단은 연수 2일 차 일정으로 순교자 최인규 권사(순교 1942. 12. 26.)가 섬기던 동부연회 동해삼척지방 천곡교회(담임목사 황용규)를 탐방하여 황용규 목사로부터 최인규 권사의 순교과정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내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며 영성을 회복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교회학교전국연합회 임원연수단 – 순교지(천곡교회) 탐방
순교자 최인규 권사에 대한 설명-횡용규 목사
교회학교전국연합회 임원연수단 – 순교지(천곡교회) 탐방
순교자 최인규 권사
권사 최인규 권사 순교비
권사 최인규 권사 순교비

일제식민지 시대의 당시에는 기독교 각 교단이 신사참배는 단순한 국가의식으로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다투어 심사참배에 동참한 때 었으나, 천곡교회의 평신도 사역자인 최인규 권사는 ①신사참배 ②동방요배 ③창씨개명 ④황국신민서사를 거부하여 투옥되어 온갖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하였다.

1. 예수님 영접과 신앙생활

그는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최돈일 님의 차남으로 출생하고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고 성장하여 18세에 부인 홍은선 씨(1897.1.7.생)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고 부유한 농부로 살았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술로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나, 40세가 되던 해 1921년 김기정 목사(북평감리교회 담임)로 부터 복음을 접하고 1952.2.15. 학습, 그해 12.7 세례받고 입교하였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일성수 하였고, 온 가족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신의 믿는 바를 이웃에 증거 하기를 기뻐하였다. 그 후 속장과 주일학교 교사, 유사, 권사의 직분을 받아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다.

2. 천곡교회 개척과 평신도 사역

철저한 신앙생활로 금주와 금연은 물론 대대로 내려오며 섬기던 우상들과 각종 제사 기물을 깨뜨려 불 살라 버릴 정도로 신앙이 돈독하던 때에 천곡기도처에 예배당을 짓기를 간구하던 권화선 속장(북평교회, 1932년 임명)을 만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밭 1,369평(당시 싯가 600원)과 논 539평(당시 싯가 450원)을 교회 대지로 헌납하였다. 그는 교회 건축을 위해 낮에는 재목을 운반하고 밤에는 새끼꼬며 열심히 기도하며 기쁨으로 일하였고, 결국 1932년 초가 8간의 예배당(북삼면 천곡리 샘실마을)을 세우게 되었으며, 1933년에는 봉헌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다음 해부터 천곡교회로 이명되어 예배를 인도하는 등 교회를 섬겼다.

3. 옥고의 수난

그는 1940년 들어서 심하게 강요되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여 동년 5월 천곡교회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 일본 경찰서장은 그에게 똥통을 지고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죄인 최인규다"라고 외치게 하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온 동네를 돌게 하였지만,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믿고 더욱 감사하며 오히려 기뻐하였다. 울진교회의 전도사역자인 신앙의 친구 차국성 권사(삼척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을 찾아가 그는 원래 정신병자인데 예수 믿고 조금 나았다가 다시 재발한 것 같으니 석방시켜 달라고 간청하자, 경찰서장은 차국성 권사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당신이 정신병자요"하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비록 혹독한 고문을 가해온 서장이지만 그의 신앙에 내심 감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그는 함흥재판소에서의 재판과정에서도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외에는 경배할 수 없으며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으로 죄인에 불과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일본은 죄악을 회개치 않으면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증언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천황을 모독한 불경죄가 추가되어 2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4. 순교

그는 간수가 매일 아침 동방요배를 강요하며 거부하면 심한 매질을 하자 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왔는데 왜 때리느냐고 항의하면서, 나는 재판소에서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라고 호통쳤다. 1941. 10. 최인규 권사(60세 정도)와 신사참배 거부로 잡혀 온 원산지방 고성교회 이진구 목사(40세)는 함께 주로 사상범이 수감되어 있는 대전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의 관계자들은 "너희 선생인 전도사와 목사들도 신사참배를 하는데 공연히 고집부리지 말고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고 신사참배를 하면 특별히 가 출옥시켜 주겠다고 하며, 처자들이 보고 싶지 않은가, 그들이 불쌍하지 않은가라고 회유 하였지만 그의 신앙적인 지조와 절의를 꺾을 수는 없었다. 나이가 많은 그가 계속되는 고문으로 몸이 많이 쇄약 해진것을 본 이진구 목사는 그가 안쓰러워 “권사님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내 보내 줄 것 같으니 그냥 건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가세요.”라고 권유하자, “목사님! 신앙적인 양심으로 말씀하세요. 나는 신앙적인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목사인 줄 알았는데“ 하면서...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고문이 계속되자 금식을 선언하고 음식을 먹지 않자 몸이 많이 쇠약해져 병감으로 이전되어 치료받았으나 이감된 지 2일 만인 63세를 일기로 1942. 12. 16 오후 2시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사모하던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

5. 유해 안장 및 순교기념비 건립

최인규 권사의 교우인 김창주는 순교한지 3년이 지난 1946.3.자전거로 약 300km 떨어진 대전 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 뭍혀 있는 최인규 권사의 유골을 찾아다가 기독교대한감리회 삼척구역 삼척교회, 도계교회, 삼화교회, 북평교회, 장성교회, 묵호교회가 공동으로 삼척읍교회 정문 우편에 안장하고 그곳에 "고 최공 인규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82.6 그의 유골을 삼척교회에서 천곡교회로 천장하고 1986년 교회정문에 ”권사 최인규 순교비“를 정사각형 탑형으로 재건립하여 신앙의 본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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