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자 고 송기득 교수님과의 인연
민중신학자 고 송기득 교수님과의 인연
  • 김봉구
  • 승인 2019.10.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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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총학생회장때 데모로 제적을 당했는데 언제 복적될지 알수 없는 상황였다. 내 꿈은 목사였기에 신학대학원을 가야하고 목사가 되야 하는데 대학을 졸업해야 신대원을 갈수 있는데, 전임 총장님은 마지막 업무가 내 복적 싸인였다고, 신임 총장님은 첫 업무가 내 복적허용 싸인였다고, 어느분이 싸인했는지는 모른다. 4학년 2학기 복적 등록금은 돌아가신 전임 유총장님이 내주셨다. 미안하다면서. 그분도 돌아가셨다.

3년만에 복적돼 졸업하고 신대원 시험을 치뤘다. 성서 영어 신학 논술 면접 몇가지 본것 같은데 학교측에선 데모로 제적된 학생을 신대원에 또 입학시켜도 되느냐 설왕설래한것 같다. 다행히 합격해 3년간 신대원을 다니게 됐고 지금의 목사가 됐다. 이때 집안인 장로교로 갔다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그쪽은 장로교 금수저 집안였다. 일부러 흙수저 길을 택했으니 남들이 보면 참 바보다. 양가가 다 장로교 통합여서 결혼조건도 감신에서 장신으로 옮기는 조건였는데 무슨 배짱으로 고생길을 사서 했는지? 홍근수 목사님께는 한신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감신도 괜찮다고 하서서 목원에서 신학을 하게됐다.
이때 송기득 교수님이 신대원 입학시험 논술인가 신학인가 내 답안지를 들고 신대원 사무실에 가서 이 학생이 누구냐고 물으셨다고, 아마 답안지에 수험번호만 썻던것 같다. 내 이름을 모르실리 없으니. 송 교수님은 이 답안지의 주인공이 궁금하셨다고, 당신은 100점 퍼펙트 점수를 주셨는데 그게 알고보니 나였다고 나중에 말씀을 주셨다. 그렇게 송 교수님께 민중신학과 철학, 조직신학을 배웠고, 당시 학부때 사회과학도 공부했고 중고등학교때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 목회에도 도움이 됐다. 송교수님이 은퇴 후 석사논문은 기독교 사회복지학으로 미국에 계신 박은규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2002년 살림교회 개척과 외국인노동자센터 설립을 동시에 같이 시작하게 된 것도 신대원에서 공부한 웨슬리 신학과 민중신학 등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대학때 송 교수님이 장로님으로 봉직하고 있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교수님의 설교를 듣는 것도 젊은 내겐 좋은 경험과 추억였다. 교수님은 역사적 예수에 천착해 있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북한 김일성대학에 가셔서 인민신학을 강의하고 싶어 하셨다. 인민신학도 그분의 민중신학의 다른 표현일테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두 아들이라 표현하시며 동일한 제목의 책도 내셨다. 살아서 인생 송별회를 하자고 하셔서 다행히 제자들과 함께 교수님과 작별인사를 나눈건 다행였다.

외국인 다문화 사역과 목회를 하면서 난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다양한 나라를 다니게 되면서 세계를 넓게 보게 되었다.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변화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성서도 세계적인 관점, 다문화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고, 민중을 위한 세계경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교수님은 은퇴후 전남 순천에 낙향해 계셨기에 재밌는 논쟁의 시간을 갖는데는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양명수 교수님이 송기득 교수님 평전을 내년 봄쯤 출간하신다고 하니 그후 다양한 평가와 논의가 더 풍성해지리라 기대가 되지만 돌아가신 송 교수님은 정작 그 논쟁의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제자의 입장에선 많이 안타깝고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제자들이 송교수님의 은사님이셨던 김하태 박사&송기득 교수 기념사업회 창립은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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