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과 전율
스릴과 전율
  • 민돈원
  • 승인 2019.09.0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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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어떤 경탄할만한 광경으로 인해 가슴 조이며 간담(肝膽)을 서늘케 한다고 할 때 영어이지만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는 표현중에 ‘스릴’(thrill)있다고 하는 말이다. 예컨대 옛날 지역을 순회하던 이동 서커스단의 공연을 연상해 보면 이 단어가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 중에 외줄타기 하는 서커스단원이 떨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곡예사의 묘기를 펼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놀라기도 하지만 통쾌한 함성을 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장면을 가리켜 스릴 있다고 표현해봄직 하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좀 다른 분위기에서 가슴 조이기는 마찬가지나 몸이 오싹하여 공포를 갖게 됨으로써 간담을 녹게 한다는 뜻으로 몸에 ‘전율’을 느끼다. 는 말이 있다. 이 공포의 전율로 떠는 순간 비명을 지르거나 그러지도 못한 상황인 경우 숨죽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스릴은 긴장감속에서도 경이로움으로 인해 이완된 마음이나, 전율은 긴장감속에서 공포심으로 인해 수축된 마음이다.

지난 주 내가 속한 선교회 정기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다. 거기서 현재 사회주의 국가로써 선교를 철저히 금지하고 말살정책을 펴고 있는 곳에 다녀온 분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민감한 사안인지라 이곳에서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떻든 그 소식을 들으면서 앞에서 언급한 두 단어-스릴, 전율-가 생각났다. 한 마디로 무사히 다녀온 그들의 한 주간 모든 여정들은 매 순간의 동선이 불안한 전율 속에서 스릴을 경험하는 초긴장의 연속이었다고 표현함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 복음의 진정한 능력은 아무 문제가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같이 철저한 억압과 방해와 살벌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곳에서도 그런 것을 뚫고 싹 트이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즉 복음의 능력은 개인적인 자유와 국가 권력에 의해 보호 받았을 때보다 개인적인 고통과 외부의 숱한 탄압이 있을 때 도리어 복음은 내성이 강해져 부흥성장에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체제에서 보장은커녕 앞길이 막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역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몸서리쳐지는 전율에 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복음이 주는 스릴임에 환호성을 외치게 한다.

사우나 가서 냉탕과 열탕을 오가며 몸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때로는 이런 영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각 교단을 들여다보아도 개체 교회를 놓고 보아도 선뜻 복음을 자랑스러움까지는 못 미쳐도 부끄러워하지나 않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는 시대가 변하고 발전하여 복음자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복음자체가 다른 것에 밀려 힘을 잃었기 때문도 아니며, 시대착오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자유가 제한받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교회를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고, 지금도 얼마든지 길거리든 가정이든 누구든 만나서 전도도 할 수 있기에 복음전파는 초대교회처럼 결코 막힌 공간이 없다. 다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후에 누적된 문제는 무엇인가? 그 중의 결정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복음을 이미 받은 나와 이 시대 그리스도인, 좀 더 나아가 너무 형식화되고 굳어져 제도화되고 ‘’문제의식’‘을 상실한 실용주의적인 교회구조적 모순들, 그리고 복음위에 군림하는 교단 패권주의의 병폐라고 본다. 결국 이런 내부적인 부패와 안일함 등에 빠져 있기에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잃어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똑같은 틀에 짜여 변화 없는 무기력한 신앙을 겨우 유지하다 보니 자체의 힘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새로운 스릴과 전율이 경험되는 사건이 일어나도록 안일하고 구태의연한 삶을 거부하게 해주는 ‘문제의식’을 품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기회를 제공하는 성경공부 모임이든 기도훈련이든 아니면 특별 집회를 통해서든지 간에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시간과 장소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끊임없이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뜻을 정하지 않고 주어진 형편에 따라 상황에 맞게 편리한대로 살려는 실용주의적 신앙이 부지불식간에 번져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도 어려우면 피하고 쉬운 것만 따라 살려는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사명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신앙의 퇴보 주의보를 스스로에게 발령해야 한다.

모름지기 우리 신앙은 스릴과 전율을 경험하는 그런 경이로움과 위기감속에서 새로운 신앙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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