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독립군으로 산다면...
영적독립군으로 산다면...
  • 민돈원
  • 승인 2019.08.2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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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시간 강단에서 기도하다 보면 주님 말씀과 함께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기도하지만 때로는 어떤 날에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얼른 그 단어나 문장을 준비한 노트에 기록하곤 한다. 그 번뜩이는 착상(着想)의 단어나 문장이 시간이 지나 잊혀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려면 기록한 것을 계속 되새김질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시간이 지난 주 새벽 강단에서 기도하는 중에 있었다. 몇 가지 단어가 내 생각 속에 계속 번뜩였다. 그리고 그 단어들이 이렇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비전(vision) - 미션(mission) - 패션(passion) - 액션’(action)

그리고 성경을 보니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하나같이 비전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비전이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다.(‘계시’, ‘묵시’라는 우리말을 NIV성경에서 Vision으로 표기 :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 오바댜, 미가, 나훔 등)

비전은 익히 아는대로 앞으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이다. 그런 점에서 아날로그적 개념에서 나침반에 비유하기도 한다. 따라서 잠언에서는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잠29:18a)라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비전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것이다. 즉 내가 나가야 할 방향제시가 선지자들과 다름없이 하나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다음으로 미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미션은 사명이다. 비전을 주신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한 미션이다. 이를위해 나(우리)에게 어떤 일, 사명을 감당하도록 불러 주시고 제자 삼으셔서 성령을 주시고 지역과 열방으로 가서 전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다. 이런 미션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 속에 생기는 동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패션, 즉 열정이다. 바울은 이 사명 때문에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예레미야는 더 이상 전하지 않으면 마음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 가진 자들 속에 끓어올랐던 패션이었다. 그런 한 개인의 감동과 열정 뜨거운 눈물과 거룩한 애통과 탄식은 그 백성과 민족을 향한 희망 자체였다. 그리고 이러한 패션을 가진 사람들은 그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액션, 즉 행동하는 양심,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까지 자신을 희생하게 된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몸소 본을 보이신 것처럼 십자가 죽음으로 산증거가 되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비전을 가진 구약의 선지자들과 초대교회 사도들은 결코 왕이나 동족들의 호감이나 인기는커녕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받을만큼 자유롭지 못한 삶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는 이 4가지가 분명했다. 하나님 말씀의 비전이 분명했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였다. 그런 그들에게는 어떤 서슬퍼런 권력이나 세상의 유혹과 풍습이 주님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지 못했다. 생명 받쳐 복음을 행동으로 실현해 내는 순교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거기에 죽지 않는 생명력이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의 이 시대를 비추어 보았다. 감리교회를 그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 애석하게도 이 4가지가 세상 것에 온통 짓이겨져서 모두 희미해진 가운데 보이지가 않는다. 그 이유는 먼데 있지 않았다. 우선 하나님 말씀이 말씀 그대로의 비전이 아닌 생계유지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의 도구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미션인 사명보다는 자신의 관록과 지위확보를 위한 탐욕에 함몰되어 비전과 미션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패션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 아닌 자기 의로 둔갑함으로써 금권 선거로 내 편 모으느라 하는 거기에 줄서 있는 자들과의 협잡으로 치졸한 모리배들이 감리회를 형해화한 지경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이렇게 나타나는 액션, 그 행동의 결과가 불을 보듯이 뻔한 오늘의 목회 현장이고 감리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설 같은 실제 목회 현장, 교단 현실을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길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의 불씨라도 모아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질곡의 어둠에서 깨쳐 일어난 소수라도 민족과 교단을 살릴 수 있는 의식 있는 영적 독립군들이 필요할 때이다. 구한 말 독립군에 들어가려면 그 자격조건으로 3가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즉 죽을 각오인데


뜻을 굽히지 않고 매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였다.

그와같이 사사로운 이익에 명분을 내주기보다 대의를 위한다면 죽을 각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의 비난과 욕먹을 각오, 인기 떨어질 각오, 그리고 보장된 자리 밀려날 각오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각오를 가지고 작금의 희망과는 영영 멀어져 버린 감독, 연회라는 기존 구태의연한 프레임을 과감히 깨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위해서는 어떤 입법이나 개정보다도 총체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대장정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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