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적 기독론이란?
복음주의적 기독론이란?
  • KMC뉴스
  • 승인 2019.07.29 2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 성모 목사 (조직신학, 은혜감리교회 부목)

한국 감리교 신학의 기독론은 정경옥의 자유주의,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 변선환의 타종교와의 대화, 그 밖에 민중신학, 과정신학, 예수 세미나, 여성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기독론을 배제하거나 거부하고 현대적 기독론만 강조할 경우 후유증은 크다.

그럴 경우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구원론이 사라진다. 예수를 스승, 개혁자, 혁명가 정도로 이해하면 구원자 예수는 없다. 십자가는 기껏해야 예수가 개혁 또는 혁명을 시도하다 살해된 현장이거나 세상의 약자와 연대 (solidarity)한 고난의 사건일 뿐이다. 또한 신론에 문제가 생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를 떠난 하나님 이해는 불충분하거나 종교적 신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목회적으로도 심각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 대해 설교할 수 없게 된다. 예수 닮읍시다가 말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목회자를 방황하게 만든다. 교회를 친교 공동체, 사회 복지관 정도로 축소 시킨다.

오늘 주어진 강의 제목은 그런 배경 하에서 바른 기독론에 대해 말해 달라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적 기독론’의 정의를 먼저 정확히 밝혀 보자. 주최 측이 20세기 ‘복음주의’ (evangelicalism) 기독론을 상정하고 그런 제목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복음주의 신학 사조는 성서 권위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중시한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부합한다. 그러나 존 웹스터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복음주의 기독론은 자유주의 기독론에 대항하는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하자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하려 애쓴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을 방어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복음주의 진영은 탁월한 기독론 대작을 아직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강사에게 주어진 제목, “복음주의적 기독론”이란 20세기 강력한 신학적 조류 가운데 하나인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 기독론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지키고 있는 바람직한 기독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교회가 바탕하고 있는 성서적이고 신앙적이고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론 말이다.

그러한 기독론은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성서에 충실하고, 초대 교회 교부 사상을 반영해야 하고, 종교개혁 사상을 계승해야 한다. 시간 제약상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분리해서 다루지 않겠다.

성서적 기독론

신약성서는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보내신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증거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인자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 구세주, 주님, 왕, 하나님이시다. 신약성서가 쓰인 목적은 분명하다. 요한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신약 성서는 구세주와 주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가 전한 복음과 하나님 나라, 그를 통해 변화된 신자와 공동체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사복음서는 예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기술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인류의 구세주라는 신앙의 관점을 가지고 그 생애, 효과, 영향에 대해 증언한다. 예수 생존 시 다양한 고백과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개혁자 또는 혁명가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내어준 사건임을 깨달았다. 예수는 유대인이 고대하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온 인류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리신 고난 받는 메시야라는 집단적 계몽이 일어났다. 그런 인식론적 혁명은 부활과 성령의 임재를 통해 가능해졌다. 따라서 신약성서 기독론은 부활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부활 신앙의 눈으로 예수의 생애, 가르침, 의미, 히브리 성경 이해가 가능해졌다. 초대교회는 AD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채택했다. 히브리 성경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는 확신 가운데 예수 이해의 연속성을 위해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눅24: 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역사적 예수’ 학파의 주장을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주요하게 다룬다. 그들은 성서가 신앙의 문서이기에 그것을 꿰뚫고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 한다. 신약성서 기자는 신앙을 바탕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기술한다. 모든 역사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주관적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탐구하고 기술한다. 이것이 역사 이해의 기본이다. 신약성서만 독특한 전제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소위 저자의 주관성과 해석을 완벽하게 배제한 객관적 역사란 환상에 불과하다. 심지어 ‘역사적 예수’ 학파도 어떤 예수상을 제시할 것인가라는 암묵적 전제 가운데 예수에 대한 성서의 어떤 묘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고, 어떤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들이 만든 예수일 뿐이다.

성서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 성서 주인공도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삶의 정점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온 몸으로 짊어지고 해결하신 사건이다 (요1: 29: 롬 5:8-10; 고전 15:3-4; 벧전 2:24).

대속사상의 부작용을 지적하며, 예수님을 스승이나 예언자로 보자는 흐름이 있다. 이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다.

초대교회 교부 기독론

초대교회가 직면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세대교체였다. 예수의 사도, 예수를 만나고 배운 이들, 제자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서를 기록하고 정경화를 시도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이단의 발흥이다. 그러나 이단은 초대 교회와 그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통 교리 (orthodoxy)를 형성하게 하는 전화위복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먼저 교리를 백안시 하는 태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자. 교리 (dogma)란 성서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교리란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을 의미한다. 초대교부들에 있어서 교리란 성서를 압축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를 이해하려면 교리를 알아야 한다. 교리란 성서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지금 감리교는 교리 없는 또는 교리를 중시하지 않는 교단 같이 되어 버렸지만, 웨슬리에게 교리 (doctrine)는 생명과도 같았다. 그는 성서적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신학적 반대파들과 치열하게 논쟁했다.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리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유일신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보다 약간 못하다고 이해했다. 유일신관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를 종속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본질 (호모우시오스, homoousios, of one being)이라는 니케아 공의회 (AD 325)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 뒤 칼세돈 공의회 (AD 451)에서는 예수가 한 분 (hypostasis, person)이시나 두 본성 (physesin, nature)을 가지신 것으로 정리해 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참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참 인간 (vere deus, vere homo, truly God and truly man)이시다. 이러한 교리적 이해는 삼위일체 (The Trinity) 교리를 형성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송영 (頌榮, doxology)이며, 자기 몸을 인류를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에 대한 찬가 (讚歌)이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당신의 구속 사역을 계속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영광 (gloria)을 돌리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 없이는 구원론을 가르칠 수 없다.

종교개혁자, 웨슬리 기독론

정통 교리 이해를 위해서 종교 개혁자 사상을 알아야 한다. 감리교인에게도 종교개혁자 이해는 필수다. 존 웨슬리 신학은 종교개혁자 사상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두 속성 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 십자가 신학 (theologia crucis) 등이 유명하지만 가장 큰 기여는 구원론과 관계된 예수 이해다. 인간은 자기의 공적 (merits, works)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 즉 외부적 의 (alien righteousness)를 통해 하나님께 나간다.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으로 몸을 감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것을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 간주하신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 이신칭의 (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개신교를 탄생하게 하고 웨슬리에게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칼빈의 그리스도론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의 삼중직 (三重職, three offices) 이해다.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직을 수행하셨다. 칼빈 구원론과 관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정론이다. 칼빈 예정론이 후대에 와서 마치 법령 (decree)처럼 오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칼빈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외된 상태에서 천상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된 예정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신자의 칭의이며 성화인 것이다.

웨슬리의 그리스도론은 성서적이며 교부적이며 종교개혁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하시는 구세주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의 힘을 파괴한다. 안셀름적인 만족설과 초대 교부들의 ‘승리자 그리스도’ (Christus Victor) 관점이 결합된 이해다. 그리고 칼빈주의와 다른 점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온 인류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온 인류에게 하나님 형상이 부분적으로 회복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제한된 이들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만유구원은 아니지만 만인을 부르신다.

현재 한국 감리교 계통 신학교와 강단 설교에서 성서적 기독론, 초대 교부들의 기독론, 종교개혁자들의 기독론, 심지어 웨슬리 기독론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교리 없는 신학교와 교회는 뿌리 없는 나무 또는 토대 없는 집과 같다. 한국 감리교 신학교와 교회는 기본을 중시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