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소리 희망의 소리
울음소리 희망의 소리
  • 민돈원
  • 승인 2019.06.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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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겠으나 비록 울음소리는 그마저도 듣기 힘든 호랑이, 하지만 내가 목회하는 이곳은 그 옛날 호랑이가 울었다 해서 호명산(虎鳴山)이 있다. 또 그 이름을 따서 호명호수가 있으며, 게다가 전철역 이름까지도 상천역과 함께 부기로 호명호수역이라 부를 만큼 호명 컨셉을 가진 지역이다. 그런가하면 지금도 가끔 농촌에서야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대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닭 울음소리다. 이것을 한자어로는 계명(鷄鳴)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충주에 가면 계명산이란 이름도 있다. 따라서 오랜 옛날 시계마저도 귀했을 때 농촌에서 새벽 일찍 일하러 갈 때나 그 외에도 시간을 알려주는 고마운 가축이 바로 닭 울음소리이다.

이런 닭울음소리를 요즈음 와서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경험하기 쉽지 않지만 피부적으로 와 닿게 그 소리를 경험한 적이 있다. 종종 필리핀 선교지를 방문할 때이다.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쯤 떨어진 까비테 실랑이라는 작은 농촌에 있는 선교지에 가게 되어 그곳 숙소에서 잠을 자다보면 덥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은 그 너머로 새벽시간에 귀에 따가울 정도로 얼마나 요란하게 들려오는지 그런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게 된다. 집집마다 많은 닭을 사육하고 있던 우리나라 예전 농촌의 전형적인 문화를 그대로 경험하곤 한다.

지내놓고 보니 그 닭들이 우리를 잠에서 깨워 준다는 사실에 고마운 생각이 든다. 물론 자금이야 또 다른 울음소리에 깬다. 바로 시계 알람소리, 좀 더 우리정서에 맞게 시계울음소리, 즉 자명종(自鳴鐘) 소리이다, 지금은 핸드폰 울음소리라고 해야 할텐데 이에 대한 적당한 한자어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이런 말도 우리나라 문화의 독특한 표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정서는 모든 것을 운다고 표현하는 문화에서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가 노래한다. 지저귀다.’ 라기보다는 ‘새가 운다.’ 라고 해야 어울린다. 이에 찬송가에도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라고 찬양한다. 그 외에도 풀벌레들의 합창이라 하면 더 어울릴 듯한데 풀벌레가 운다, 매미가 운다, 개구리가 운다, 소가 운다, 심지어 ‘문풍지가 바람에 떨리다.’ 로 표현하기보다 ‘문풍지가 운다.’ 등 모든 자연의 소리나 움직이는 것까지도 우는 것으로 본 이런 문화에 익숙해 있다는 정서임을 이들은 반영해주고 있다.

지나치게 징징거리는 거야 권장할 건 못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 눈물이 마른 울음이 없고 통곡이 없다면 사람 사는 삭막한 세상이 어떻게 될까? 를 우려해 본다. 아마도 우리 감정 이탈이 일어날 것이고, 속병이 생길 것이며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울음, 더 나아가 통곡은 억눌렸던 내재된 감정의 외부로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마냥 속으로만 삭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지만은 않다는 것은 이미 관련 학계를 통해서도 증명된 바다.

더욱이 이에 대해 그 어떤 곳보다도 성경에 통곡하는 기록과 통곡하는 주요 인물들이 언급되고 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을 듣자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보김’(통곡하는 자)이라고 그곳을 불렀다(삿2:5) 나아가 한나 여인의 통곡, 히스기야 왕의 통곡은 그들의 당시 처한 현실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다. 특히 베드로의 통곡은 앞에서 언급한 닭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에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비로소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회개가 일어나는 사람은 닭이 우는 소리만 들어도 자신의 잘못을 보지만 마음이 강퍅해지면 바로 왕처럼 나라가 어려워져도 땅과 바다 초목이 재난을 당해도 버티고 회개는커녕 더 사나워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눈물과 통곡은 개인도 바꾸고 역사를 바꾸기까지 한다. 라고 할 수 있다.

나무줄기에서 점성 액체가 분비되는 나무로 발삼나무(balsam tree)가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눈물골짜기를 말할 때 나오는 눈물을 이 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건강에 좋다는 고로쇠나무에서 나는 수액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나는 독특하고 흔치 않은 귀한 수액을 가끔 생산되는 철이 되어 성도들의 사랑으로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색깔은 약간 흐리고 맛은 달콤한 맛인데 몸에 좋다고 해서 시중에서 시판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고로쇠의 수액은 어찌보면 그 나무가 흘린 눈물인지라 사람에게도 보약이 아닐까 나름 해석해 본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본질은 아닐지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한 요소가 있다. 곧 영적인 메마름, 고통중의 가장 위험한 요소를 하나 들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말라 버린 삭막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윗의 신앙회복은 죄를 지은 이후 얼마나 주님 앞에 흐르는 눈물이 많았는지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울 만큼이나 되었을까 하는 그가 쓴 시편의 고백 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 눈물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볼 때 바라기는 이런 눈물이 이 민족의 예배드리는 강단에서 에스겔 선지자 시대처럼 성전문지방 밑에서부터 스며들던 물이 점점 차고도 넘쳐 건너지 못할 가득한 강물이 됨으로써 강 좌우편에 나무가 많아지고 바다가 살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아져 어부가 살고 잎사귀가 약재료가 되는 등 생명의 행진이 지금이야말로 일어나야만 할 때이다.

그리하여 다시 이 민족 곳곳에 생명력을 상실하고 메말라가는 사람 사는 우리의 불편한 진실한 모임의 현장을 비롯하여 정치현장, 초, 중, 고, 대학의 교육현장, 기업과 산업현장에 내 부실한 존재에 대한 정직한 통곡의 눈물이 밑거름되어 힘찬 영광의 환호성으로 외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애기 울음소리가 사라지면서 교육의 희망도 사라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기도의 눈물로 마른 바닥 적신 울음소리가 교회 바닥에 어느 샌가 사라지면서 영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들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야 정상적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우선 교회 안에서부터 그리고 온갖 기독교의 이름으로 감투 쓰기에 여념 없다보니 그 자리에서 그 직위를 가지고 무언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나머지 주님보다 부풀어지고 커져서 스스로 흐르는 눈물이기보다는 남의 눈에 눈물 나게 만드는 일들을 그치고 제자리로 돌아서는 자기정화의 눈물의 능력을 회복할 때 우리에게 다시 희망은 찾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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