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영안이 감겼다
여자의 영안이 감겼다
  • 이구영
  • 승인 2019.02.01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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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와 뱀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우선 뱀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여자가 나무를 보니까 이상합니다.

그동안은 그렇게 느껴 본적이 없는데 왜 그날따라 그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먹으면 굉장히 머리가 좋아질 것 같이 탐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본즉” 이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와테레’ 는 ‘본다’. ‘감찰한다’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다시 본다’ 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날따라 다시 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영안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 나무를 잘 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못 먹는 것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뱀이 유혹을 하니까 다시 보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자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먹음직합니다. 보암직합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천주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냥 본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와는 영안이 감기어지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육안이 열렸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별력이 약해졌습니다. 사랑도 식어졌습니다.

이 3가지는 영안이 닫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들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도 엘리사의 사환이나 이스라엘 왕, 아람의 군사들이 모두 영안이 닫혀있을 때 두렵고, 분별력도 사라지고, 사랑도 식어지고 용서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있던 엘리사는 두려움보다는 평강이, 지혜와 사랑이 그를 지배했었습니다. 영안이 열려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한 번도 두려움이 없었는데 영안이 닫히고 육체의 눈이 열려버린 후로 두려움 생겼고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숨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열렸을 때는 한 번도 유혹의 대상이 아니었던 선악과가 영안이 닫히고 육체의 눈이 열리니 먹어도 되는 나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영안이 열렸을 때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이었던 사랑과 관계가 깨어지고, 책임을 전가시켜야 하는 그저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하와를 고발하고, 하와는 뱀을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두렵지 않던 날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 두려움을 어느정도 느끼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사람, 소망의 사람, 인내의 사람에게는 영안이 필요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육체의 소욕앞에서 감긴눈이 되어버려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혹 앞에 영안이 닫히면 동시에 육체의 모든 것들이 살아납니다.

나는 오늘 영안이 열려있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와 뱀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우선 뱀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여자가 나무를 보니까 이상해요 그동안은 그렇게 느껴 본적이 없는데 왜 그날따라 그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먹으면 굉장히 머리가 좋아질 것 같이 탐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본즉” 이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와테레’ 는 ‘본다’. ‘감찰한다’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다시 본다’ 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지나치면서 스치듯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다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 나무를 잘 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못 먹는 것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뱀이 유혹을 하니까 다시 보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자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닌줄 알았는데 먹음직해요, 보암직해요,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요.

이런적 없으세요? 그냥 별것 아닌줄 알았는데 그날 따라 그 물건이 내게 꼭 필요해보이고, 좋아보여요. 꼭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냥 평범했는데 그날 따라 그 남자가 멋있어 보이고, 왠지 심장이 쿵쿵거려요.

별 관심도 없었는데 그날 따라 그 여자가 예쁘고 아름답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요. 이런 것을 본다, 다시 본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과거에 수도 없이 보았을 때는 그냥 그랬는데 왠지 그날따라 다르게 보여요. 그게 ‘본즉’.. 이라는 표현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이나 지난번까지 사용했던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그냥 ‘본즉’ 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천주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냥 본게 아닙니다. 무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쳐다보기 시작한거예요. 나무의 입장에서 그날따라 불쾌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성추행의 기준이 뭐냐고 물으니까 ‘불쾌감’이래요

그가 나를 쳐다볼 때 내가 불쾌감을 느끼면 성추행이래요. 그가 나에게 손을 대었을 때 불쾌감을 느끼면 성추행이래요. 선악과라는 나무의 입장에서 다른 날은 여자가 나무를 보았도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여자가 나무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거에요, 불쾌해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본즉’ 이라는 단어입니다.

자 이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았는데 그렇게 보다 보니까 곧 따 먹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입장에서 공격을 당한 거예요, 불쾌함을 넘어서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지더니 결과도 달랐습니다. 그와 동시에 여자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열매를 먹었을 뿐인데 눈이 밝아져버렸습니다. 여기서 밝아졌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의 뜻으로는 열렸다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마귀의 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your eyes shall be opend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은 대게 환상을 보거나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사용됩니다. 분별력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호기심을 가득찬 여자는 드디어 그 열매를 먹게 되었고 그 결과 눌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열렸습니다. 눈이 열리면서 무엇인가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3장 7절은 열매를 먹은 결과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경험해본적 있으세요? 그냥 평범했는데 그날 따라 달라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력에는 문제가 없어요. 또 시각의 문제, 사물을 보는 관점의 문제도 아닙니다. 똑같은 촛불시위나 태극기 시위, 혹은 입시제도나 스카이캐슬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당이었는데 여당성향이 되었다 혹은 보수이었는데 진보가 되고, 반대로 진보 성향이었는데 보수성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결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엄밀히 이야기 하면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시력에 문제가 생긴것도 아닙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런 표현 들어보셨나요? 지안 혹은 영안! 지안이 떠졌다. 영안이 열렸다!

지안은 깨달음을 얻을 때 열리는 눈입니다. 불교적 표현으로 제 3의 눈! 석가모니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제 3의 눈입니다. 득도했다거나 특별히 인간세상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에게 열려진다는 눈 그게 제 3의 눈, 지안 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자는 이 지안이 열린게 아니예요.

이런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 여러 군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집 앞에 나와 서성거리는데 나그네 세명이 집 앞 대로를 통과해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보았는데 그날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 세명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임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 있으세요?

시력도 시각도 지안도 아닙니다.

이사야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 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은 왕족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웃시야라고 하는 왕은 분열왕국 남 유다의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치를 잘하던 성군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규합하는 정치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외세의 침략이 많던 그때에 전국적으로 모병을 해서 많은 군사를 양성하여 앗수르나 바벨론과도 싸워 이길 정도의 국방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어서 사람들이 참 살기 편했고 모든 것이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웃시야 왕이 교만해져서 그 모든 것이 다 자기가 잘 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까불고 다니다가 어느 날은 제사를 드리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옛 부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제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하신 제사장만이 드리는 것이지 결코 왕이라고 해서 제사를 드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예로, 사울이라고 하는 왕은 왕 신분에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블레셋인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뻔히 아는 웃시야왕이 너무 교만해지고, 마치 유대나라가 잘 사는 것이 자기의 공적인 냥 떠들어대고 자랑하다가 결국 제사장의 직무를 넘보게 됩니다. 제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문둥병이 들어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정치력이 뛰어나던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나라는 술렁댑니다. 정치적인 싸움은 시작됩니다. 경제적인 안정은 깨어지고 물가는 치솟고, 수출은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점점 강성해지던 바벨론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유다를 쳐들어 오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의 때에 사람들은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고 혹 어떤 이는 재산을 축적하고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는 점점 죄악이 번성하고 이기적이 되고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양 떠드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악이 극심해 지고 사람들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육적인 눈이 발전하고,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영안이 감기워 졌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카오스, 혼동의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유대나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간구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구약성서의 유명한 선지자인 이사야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한참을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열리며 그가 하늘의 보좌를 보게 됩니다. 육안이 열린 것 아닙니다. 영안이 열렸습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 6:1-3]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도다 천사들이 모여서 서로 창화하여 외치니 그 소리는 성전에 가득하도라

예배 도중에, 기도 도중에 영안이 열린 이사야는 하늘보좌를 보았고, 스랍들을 보았고, 천국을 보았고 그 후로 그는 평생토록 하나님만 증거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니까, 남들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듣게 되니까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생을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을 증거 하다가 죽습니다.

사람들에게 니가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도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시끄럽다고 달려들어서 묶어 톱으로 썰어서 죽입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이사야는 자신이 본 영적인 세계를 증거 했습니다. 이사야는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다 알았기에 답답했습니다. 육의 세계만 아는 사람들은 이 땅만 생각하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늘을 보았기에 그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영안이 나옵니다. 영적이 눈입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눈, 미래를 볼 수 있는 눈,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는 눈, 매사에 하나님과의 연관성과 성령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천국은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교회는 나와도 구원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형식적인 썬데이 크리스챤은 될 수 있어도 working with JESUS 매일 주와 함께 동행 할 수는 없습니다.

육안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이성과 사회적인 관습과 상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린 사람은 모든 것의 기본이 신앙의 양심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야유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가운데는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띠여 져서 하늘을 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실패가 결코 영원한 실패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나무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이 영안이 열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육적인 프레임에만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이 영안이 열린거예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 그도 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하늘을 보았습니다. 똑 같이 길을 가는데 유독 바울에게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빛이 보였습니다. 참 이상한거예요. 베드로 목사님을 비롯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 보면 엘리사 목사님과 그의 몸종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몸종은 과거의 하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눈이 다른 것이지요, 보는 곳이 다른 것이지요, 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이 열려서 이사야 처럼 하나님의 보좌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까 이 땅이 별것 아님을 안 것이고, 영원한 하늘나라, 그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그 나라를 이 땅에서 맛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 토록 애쓰는 것이지요, 포기하고, 희생하고, 잠 못 자고, 못 먹고, 못 입고 불편을 감수하면서.

결국 니고데모도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보는게 달라집니다.

이 거룩한 동행에 함께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눈이 달라져야 지요. 보는것이 달라야 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거듭나서 가치관이 달라지고, 행동과 습관의 변화를 추구하는 거룩한 열정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보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참 신앙인들, 예수님 닮아가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날 여자는 눈이 열리고 눈이 닫혔다. 영안이 닫히고 육안이 열렸다.

평강과 두려움을 같이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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