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눈을 뜨고
눈을 감고, 눈을 뜨고
  • 윤미애
  • 승인 2018.12.26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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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과 16장을 읽어가는 데 ‘보다’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15장 32절에서 대세자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혹시 보면 믿을 수도 있다며 예수를 조롱하는 말이지요. 39절에서 어떤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과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을 보고 하는 말이지요. 부활한 예수는16장 14절에 이르러서 열한 제자를 믿음이 없다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거든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봅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나님을 협박합니다. 이런저런 증거와 기적과 역사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투덜댑니다.

드물긴 하지만 간혹 보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질책을 당합니다. 본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이미 들려졌는데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봄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 그리고 봄으로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보지 않고 믿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 그것을 위해 저는 눈을 감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눈을 감지 않고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도저히 끝낼 수가 없거든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면 내 밖에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그것들이요. 눈을 감아야 비로소 내 안이 보입니다. 그제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는 바로 그분 말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고요 속에 머물거나, 맘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구를 아룁니다. 그제야 힘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는 힘이.

미약하지만, 보고 믿는 것에서 믿고 보는 것으로 순서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제 눈을 뜹니다. 어디든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내가 새로워 보입니다. 문제라고 여기던 것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자, 이제 새롭게 마주한 세상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

사실 이 말씀은 한 해 동안 묵상한 말씀입니다. 기도와 구제가 무얼까 고민하면서요.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의 한 방법이라면 구제가 세상과 관계 맺는 한 방법이겠지요.

구제라... 부자도 아닌 내가 어떻게 구제를 할 수 있을까요? 구제라는 단어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이미 알던 좁은 의미로 제한하지 말고요. 멀리 있는 거창한 단어로 보지 않습니다. 남녀 사이에 흔히 하는 말, “내가 너 구제했지.”처럼.

구제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내가 가진 것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갑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 ‘내게 있는 이것’으로 서로를 구제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빵 굽는 이는 맛있는 빵으로, 지식이 많은 이는 가르침으로, 예술을 하는 이는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서로를 구제하면서.

그렇다면 나는 새롭게 마주한 세상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을까를, 나는 어떤 종류의 구제를 행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한해를 되돌아보며 새해를 계획하는 요즈음, ‘기도와 구제’에 대해서 묵상하던 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해로 바꾸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눈을 감겠습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겠습니다. 보고 행할 수 있도록. 이렇게 가볍게 사는 새해가 되기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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