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큰 두 축
목회의 큰 두 축
  • 민돈원
  • 승인 2018.12.2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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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을 읽을 때마다 나는 바울이 주는 크게 두 가지를 목회 현장에서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은 바울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이기도 한 ‘주(예수)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이다. 이 말을 서신서 마다 그는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른다.

그 말속에 바울의 인생관이 다 들어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주님을 떠나서는 자기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따라서 예수님보다 고상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예수님만은 잃을 수 없었다. 그런 삶이었기에 살기위해 복음을 믿는다거나 전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불편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예수로 사는 일에 올인 했다.

다른 직업은 몰라도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하기 전 가졌던 생각은 돌이켜 보면 일면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믿음이 삶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과 비교하면 바울의 삶의 스토리가 마치 동화속의 이야기로 들릴 만큼 부끄럽기만 하다.

바울은 주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여긴 사람이다. 구차하게 생명을 견지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복음 전하다 옥에 들어갔을지라도 당당했고 옥문이 열려도 도망치기는커녕 간수에게 도리어 복음을 전하여 그 집안 식구가 모두가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 총독 앞에서나 왕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심문하는 권력을 쥔 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아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황제에게 재판 받도록 요청하여 압송되어가는 중 배가 폭풍을 만나 276명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는 여유와 담대함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그의 평안함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잘 증거해 주고 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전설적인 믿음의 사도였고 기록된 말씀을 몸으로 증거 해 낸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사도였다.

다음으로 인간과의 관계이다. 즉 바울이 복음 전파하는 일에 수많은 사람의 자랑스런 이름들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동역자로 붙여 주신 사람들이다.

예컨대 로마서16장에서만 무려 36명의 복음의 협력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비롯한 각 서신서를 합해 볼 때에도 20여명이상의 또 다른 바울의 사역에 힘을 실어준 그 이름들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중에는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거나 자기 배만 채우는 이기적인 자들, 말꾼이 되어 남을 미혹시키는 자들 그리고 심지어 바울에게 해를 끼치거나 양심을 저버리거나 믿음이 파선된 자들- 후메내오, 알렉산더-의 불명예스런 이름들이 없지 않다.

내가 목회를 해오는 과정 중에서도 지금도 헤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목회에 큰 힘이 되도록 받들어주고 교회 충성되게 섬기되 말없이 몸으로 섬기던 이름들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종종 그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게 된다. 교회에서 충성된 자들의 특징은 절대로 큰소리치지 않는다. 대신 기도할 때만큼은 그 에너지로 큰소리친다. 그리고 몸으로 물질로 충성하되 생색내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회의 때만 되면 큰소리부터 치는 자들이 주로 정해져 있다. 대개 그들을 보면 개인이나 자녀문제 등으로 상처가 많은 이들이고 지방이나 연회 활동을 해 본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이다.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자기 위상이 상실되었을 때 덕스럽지 못한 자들이 조용히 물러나는 대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나머지 자기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려 할 때 흔히 회의 때마다 나서서 큰소리치고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다.

이처럼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그 배후에는 그가 주안에 자신의 전부이신 주님을 발견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빼놓을 없는 또 다른 축이라면 그를 받쳐주고 지지해 주는 수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앞으로 남은 주님의 목회가 되기 위해 내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울처럼 나의 영적 부모와 같은 스승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같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동역자, 고난의 현장(옥)에도 함께 갇힐 만큼 감동된 마음을 가진 아리스다고와 에바브라와 같은 일꾼 세워 주님의 지상 명령이 차질 없이 증거되는 것 말고 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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