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염시키는 예수꾼
복음을 전염시키는 예수꾼
  • 민돈원
  • 승인 2018.12.0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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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월요일 새벽 1시 가까운 시간에 아들이 다니는 학교 기숙사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단하니 A형 독감으로 판명되어 전염이 되지 않도록 격리차원에서 귀가해야 하니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도 그렇고 하여 그 주변 몇몇 대형 병원에 전화를 하여 입원 할 수 있는 병실을 수소문하였다. 그러나 그나마도 병실이 없었다. 이에 그 병원에서 아침까지 영양제 주사를 맞으면서 아침을 기다렸다 집으로 오는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아들은 결국 귀가조치를 받아 이곳 집으로 왔으나 집에서도 우리와 같이 지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도 접촉을 피하느라 교회 예배당 유아실에 독방(?)을 마련하여 이곳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는 외로운 신세가 되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주가 시험기간이라는데 1주일간 학교도 가지 못한 채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닌 정신적인 부담까지 가중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독감, 전염병, 격리, 고통, 손해 등... 이것이 독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나쁜 영향력이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24장을 새벽 말씀을 전하다가 문득 한주일 전 아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그것은 독감바이로스와 다른 좋은 영향력이었다.

여기에 보면 바울을 고발한 군중 편에 서 있는 더둘로라는 변호사가 벨릭스 총독에게 4가지 죄목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전염병같은 사람이다, 유대인을 소동하게 하는 소요죄를 일으켰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성전을 더럽게 한다.’ 이다.

그러나 사실 이후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에 대해 바울이 소명을 밝히고 있는 내용의 중요한 핵심요지는 단 한가지이다. 예수님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 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사도행전에 23장에서 율법문제에 관한 것이지 실정법인 로마법에 저촉되어 바울이 재판받을 이유가 없음을 천부장도 스스로 고백했던 바였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바울의 죄를 앞에서 언급한 4가지로 누명 씌운 것-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목을 보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4가지였다. 사실 예수님도 고발 당하셨다는 말씀이 눅23장에 기록되고 있는데 역시 3가지 조작된 실정법 위반의 죄명이었다. 예컨대 ‘백성을 미혹한다(소요죄),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금한다, 로마 황제 외에는 왕이 없는데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눅23:2) 이 3가지를 잘 들여다보면 바울도 예수님이 고발당하신 죄명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 다시 바울이 당한 4가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전염병이라는 비난이다. 복음은 죽은 우리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살리셨다. 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복음이다. 이를 믿는 것이 축복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아니 그들의 표현방식으로 전염시켰다. 내가 말씀을 전하면서 부끄러웠건 바로 이점이다.

과연 복음을 전염시키고 있느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도용품을 들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두 번째 죄목은 소요죄이다. 바로 내가살고 있는 주변이나 지역에 거룩한 소동을 과연 일으키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교회가 있어도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아무 영향력도 없고 믿는지 안 믿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모습들이 부끄러웠다. 복음이 있으면 결코 조용하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지역에 거룩한 소동을 일으킬 때 복음을 믿는 우리가 진짜가 아니겠는가?

세 번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비난도 그렇다. 어쩌면 이 비난은 최근 이단들이 가장 좋아하고 자기 합리화로 남용하는 성경적 근거라고 우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울은 이럴 만큼 철저히 예수님을 확실히 증거하는 예수꾼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다만 우리는 좋은 의미로 핀잔 받는 예수쟁이, 예수꾼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 믿고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할 만큼의 높은 자존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부활을 가르치고 증거하기에 받았던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비난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만 이야기했다면 바울은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전함으로 당한 심문과 채찍 맞음과 투옥과 살해 위협이 아니었던가?

사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 유대주의자들에게 그 화살이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내가 전하고 있는 성전은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해져 가고 있는지에 대한 반문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것은 다 빼버리고 혹시 솜사탕 복음이나 감로주같이 단 것에만 길들여지도록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성전을 더럽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내면의 책망과 함께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하는 한 주간이었다. 이에 스스로 4가지를 자문해 본다.

예수님 전하다고 고발당해 보았는가? 복음을 전염시킬 만큼 살리는 영적 바이러스를 퍼뜨려 지역과 나라에 영향력을 미칠 거룩한 소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목사로서 세상의 수많은 탁월한 전문가들처럼 예수님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가? 그리고 마음의 성전은 과연 깨끗한가?에 대한 물음이 바울이 고발당하여 누명 씌워진 4가지 죄목이 주는 위대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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