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이든 감독이든 조심할 메시야 콤플렉스
목사이든 감독이든 조심할 메시야 콤플렉스
  • KMC뉴스
  • 승인 2018.11.2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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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구원자이다. 그리고 그 구원자는 우리가 고백하고 믿는 개인과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주(퀴리오스, the Lord)이고, , 구세주(the Savior)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치는 이 시대 목회자들의 절대다수가 부지불식간에 ‘메시아콤플렉스’(Messiah complex)라는 함정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의 카톡 프로필 란에 ‘이 지역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았다. 평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이다. 행복한 목사라는데 하등의 시비 걸 사람도 없다. 다만 그런 메시지를 여러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에 올려 그 지역에 있는 목사보다 은근히 괜찮아 보이고 싶은 속내와 오늘날 교인들의 생리로 미루어 보건데 이래저래 심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넌지시 사로 잡아보려는 심리 또한 없다고는 할 수 없게 보여 태클을 한번 걸어 보는 거다.

한편 자신은 불행하다는 감정을 억제하고 다른 교역자들과의 사이에서도 더 나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써 자기같이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돕는 자로 보여주고 싶은 경우도 없지 않다. 물론 자신을 잘 보이려 하는 것이 아닌, 사심 없고 그 안에 자발적인 발로에 의해 풍성한 행복이 넘쳐흘러서 돕는 이런 정상적인 틀을 가진 사람이야 시비할 일 아니지만 사실 심리적으로 대부분 대중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일수록 이런 경향이 다분하다.

이런 짙은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목회자이다. 특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교주들의 지탄받는 행태들이 바로 메시아 콤플렉스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을 보면 슈퍼맨이고, 왕 아니면 왕자병에 걸려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에 버금갈 정도로 돕는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런 증상은 사이비 교주만의 이야기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불편한 현실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가 처한 목회 현장에서 교회법과 사회법을 넘나들면서 온갖 불법, 불륜을 자행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교세를 토대로 초법적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고, 심지어 한 연회내지는 감리회를 위해 일한답시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호세력들의 지지 속에 수장까지 올라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멘탈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승복하기보다는 측근들의 힘을 등에 업고 철저히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거나 법적인 안전장치까지 쌓아 둔 맘몬으로 사들여 방호벽을 구축할 정도로 힘없어 보이는 예수님과는 상반된 튼튼한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위장한 천사로, 또는 선한 일꾼으로 가장하여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모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감추어져 있다. 이것이 메시아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전조증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면 속에는 이권, 교권, 라이벌 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는 것들이다. 그중의 라이벌 의식 하나만 보더라도 정치권에서나 운동선수들 사이에서만 그런 라이벌 경쟁구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방불케 하는 곳이 있는데 목회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목회현장이다.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장 불편한 진실중의 두드러진 핸디캡중의 하나가 자신들 스스로가 1인자로 자처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미묘할 정도로 베어 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로의 팽팽하고 긴장된 대립관계는 이제는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할 정도로 길들여진지 오래이다.

그래서 인간은 잘못 길들여지면 아무리 고마운 일이라 할지라도 고맙다는 표현이 사라진다고 한다. 목회가 두려운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이다. 몰라서 못하는 목회야 큰 흉이 될 수 없다. 전도사이기에, 안수를 안 받았기에 목회를 못하고 불신자들이 안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스펙이 상대적으로 출중하지 못하기에 목회가 안되는 게 아니다. 시골이라, 아니 삼남지역에 있는 곳이라 목회가 힘들다고 하는데 돌이켜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에둘러 이야기 할 것도 없고 십자가 희생의 영성을 지닌 내면화 없이 기능적으로 닳고 닳도록 길들어져버린 목회, 목사의 목표가 판에 박은 듯 너나 할 것 없이 감독과 같은 폼이 나는 자리 획득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져 가는 제도화 되어버린 감리회, 여기에 메시아 콤플렉스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자기왕국을 세우려는 영웅담 이야기들이 이쯤에서 끝내야만 된다.

왜냐하면 까딱하다가 이 콤플렉스에 갇혀 사는 한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 채 살게 된다면 남은 생애가 고통스럽고 불행한 나날로 점철되어 큰 낭패 당할 수 있음을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우리에게 엄연히 주는 교훈이다.

그런 다음 제자리 찾기 하면 된다. 이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슈퍼맨이나, 메시아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예수님 이름을 사칭하여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이려 꿈꾸는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허구적 프로그램을 삭제하자. 서로 하려고 하는 자리는 무언가 자기영광과 인기, 이익, 박수갈채가 보장된 까닭이다. 그곳은 지원자가 새치기해서라도 줄을 선다.

그 대신 새로 도입되어야 할 잊혀져가는 십자가, 아무도 안 지려 했기에 주님 대신 구레네 시몬이 져야만 했던 그 십자가의 길이 우리의 목회 현장이어야 하고. 라이벌 대결해서 감독되려는 분들의 의식개혁의 장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감리회 희망은 메시아 콤플렉스의 과대망상적인 마이웨이로서의 영웅이 아닌,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지어진 십자가와 같이 매력 없고 인기 없어도 주님 가신 그 길 가겠다며 서로 지겠다는 거룩한 라이벌 경쟁하는 그런 지도자가 보일 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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