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거리두기
  • 윤미애
  • 승인 2018.11.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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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의 통화는 참 깁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한참을 통화하고도 마무리 인사는 주로 “또 통화해.”입니다.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다보니 주제는 무궁무진합니다. 최근의 주된 이슈는 언니가 새롭게 시작하게 된 일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할 때는 으레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시소를 타게 되지요. 언니의 마음이 딱 그러합니다. 시소가 두려움 쪽으로 기울게 되면 언니의 고민이 커집니다. 그러면 통화는 주로 언니의 고민으로 채워지지요. 가만히 언니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다보면 언니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럴 때는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며 저의 생각을 말합니다.

오늘은 전화를 끊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남의 이야기는 더 쉽게 들리지?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남 이야기처럼 들어 볼까?’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는 드라마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참고로 저는 장기의 장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허나 제 생각에 ‘훈수 訓手’를 두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구경꾼들이 어떻게 훈수를 두느냐에 따라 승패도 달라지고 장기판의 분위기도 달라지니까요.

당사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수가 훈수를 두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 물론 훈수를 두는 사람이 장기에 훨씬 능통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인 동네 장기판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수가 보인다는 것, 그것에 어떤 비밀이 있지 않을까요?

장기에서와 대화에서 훈수두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거리두기, 그것이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장기에 몰두해 있으면 주변이 보이지 않고, 오직 나의 수만 보이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거리를 두고 폭 넓게 볼 수 있지요. 그러니 더 좋은 수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비슷합니다. 내 이야기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여유가 없지요. 일과 그것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함께 요동치고 있으니까요. 남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문제와 해결책이 좀 더 선명히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냉동실에 보관하던 오메기떡을 전자레인지로 처음 해동하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해동시간이 좀 길었나 봅니다. 안에 들어 있던 팥소와 반죽 그리고 떡의 겉면에 묻힌 팥고물이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뒤엉킨 팥소와 반죽과 팥고물처럼, 일과 그것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하나로 뒤엉켜있지요. 그러니 더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요.

하여, 어떤 일을 앞에 두고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거리를 두고 그 일을 살피면 좋을 것 같아요. 내 친구의 이야기라면 뭐라고 조언할까 생각해 보면서요. 거리두기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닐 겁니다. 부정적 피드백 없이 들어줄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친구가 없다면 써보기를 권합니다. 일과 생각과 느낌을 분류해서 써보는 겁니다. 그 과정이 거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문제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경험으로 보니 그래요. 한 고개 넘으니 다음 고개가 버티고 있듯이 한 문제 넘으면 다음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더군요. 그래서 잠언 저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 16:32)고 말했나 봅니다. 빼앗아야 할 성은 내 앞에 계속 있을 터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지금도 성 앞에 서 있습니다. 성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성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성을 빼앗을 방도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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