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본질을 붙잡으라
목회의 본질을 붙잡으라
  • 송근종
  • 승인 2018.10.13 2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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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다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들고 씨름할때가 많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로서 본분인 기도와 말씀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삶을 게을리하고 목회의 부수적인 면, 즉 행사나 회의, 기타 활동들에 부산을 떠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교회행사 프로그램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다. 물론 목회를 하다보면 전도나 홍보 프로그램 등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 올 뿐 목회에 지속적인 힘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천상 한 명이 되었든 열 명이 되었든 그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은 기도와 말씀뿐이다.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면 꼭 들르는 것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한 바트브루크 성의 작은 방과 더불어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느 성안교회와 그가 30년동안 말씀을 전하며 시무하던 시교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작고 외딴 곳의 성이요 그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교회였다는 것이다. 루터도 마찬가지로 평범한 신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방에서 시작한 독일어 성경 번역과 개혁운동이 결국에는 개신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의 기치와 더불어 전 세계적인 종교개혁의 물결을 일으켰다.

오늘날 교회의 쇠락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제2의 종교개혁을 외치며 본질로 돌아가자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 본질이 무엇인가? 아마도 모두가 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일게다.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에 충실한 설교자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먼저 말씀대로 사는 삶에 본을 보이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도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느 평신도 지도자의 말대로 '요즘 목사님들에게서 경건의 능력은 고사하고 경건의 모양이라도 볼 수 있나요?'라는 자조섞인 탄식이 가득한 것이 문제이다. 이전투구에 정신이 팔려서 감리교회를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는 작금의 감리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닐게다.

필자가 속한 지방에서 진행하는 종교개혁지 순례를 하면서 은퇴하신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서 목회의 본질은 역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전하신다. 수십년의 목회를 마감하고 돌이켜 보면 결국 말씀만이 목회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도와 교회를 변화시키더라는 것이다. 이에 중견 후배 목회자도 간증을 통해서 하루에 한시간씩 매일 성경 통독을 하면서 성경 100독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 방법을 달리해서 성경을 좀 더 세밀하게 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다독하면서 성경전체의 맥락을 짚은 후에 깊이 있는 연구를 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면서 목회자는 더욱 더 경건의 능력을 갖춘 이로 변화되어질 것이다.

앞선 글에서 이미 강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씀을 가까이하고(자주 읽고) 말씀대로 사는 일에 충실하자. 어느 피아니스트는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수천번 같은 곡을 연습한다고 한다. 악보를 완전히 외우는 것은 물론 곡해석의 깊은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목회자는 어떤가? 어떤 목회자의 말대로 '성경이 목회자의 밥줄'이라면 더더욱 밥줄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나중에 갖추어야 할 목회자의 자세가 아니라 지금 당장 구비해야 할 목회자의 자질이다. 성경에 무지한 목회자는 꿈이 없다. 목회의 본질은 다른것이 아니다. 성경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 종교개혁지 순례 중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바트부르크에서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바트부르크성의 한 작은 방 / 사진촬영 송근종 목사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바트부르크성의 한 작은 방 / 사진촬영 송근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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