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그리고 삶
말과 글 그리고 삶
  • 윤미애
  • 승인 2018.10.03 0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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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에 이런 내용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히던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 나에게 생기면, 그를 바라보는 대신 나를 보며 ‘나를 축복합니다.’라고 말해보자고요.(9월 5일. ‘바꾸고 바꾸어’ 참조)

아니나 다를까 나를 시험하는 일이 생깁니다. 나에게 알렉산더가 등장한 겁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말이지요. 내가 글처럼 살 수 있는지 하나님이 궁금하셨나 봅니다. 그를 보내신 것을 보면요.

역시, 글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또 배워갑니다. 단지 그러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이따금 강의를 합니다. 에니어그램이나 자기를 사랑하는 법, 서로를 이해하는 법 등에 대해서요. 강의를 준비하면서 혹은 강의를 하고 나면 어떤 강박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는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나? 나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며 살고 있나?’ 이런 질문들을 나에게 던집니다.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거지요.

이처럼, 내가 하는 말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는 때도 많습니다. 말처럼 살기가 참 어려우니까요.

말과 글은 비교적 쉽습니다. 살아가는 삶이 훨씬 힘듭니다. 말과 글은 마치 변화산의 베드로 같습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고 초막 셋을 짓고 거기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삶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살아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요청합니다. 삶의 현장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이지요.(마가복음 16장 7절)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지금 여기를 잘 살라는 말씀이겠지요. 말과 글이 삶으로 살아질 때 비로소 힘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영적 수준에 대해서도 궁금해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수준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바울서신을 읽어가며 제가 찾은 답은 이것입니다. 영적 수준은 삶의 수준과 닮아있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해줍니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단정해야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해야 합니다. 잘 가르쳐야 합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외인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감독은 또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구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독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요. 기도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는지, 헌금을 얼마나 드려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만 말해 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서가 아닐까요? 영적인 수준은 삶의 수준으로 가늠이 되니 그런 것 아닐까요?

어제는 감리교 지도자들을 뽑는 감독선거가 있었습니다. 감독선거에 대해서 잘 모르고 큰 관심도 없습니다. 부디 선출된 지도자들이,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선한 일을 사모하는 분들이길 바랄 뿐이지요. (딤전 3장 1절)

다시 나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며 내 안에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말과 글과 삶이 일치하면 좋겠다는 소망, 그래서 말과 글과 삶에 생명력이 넘치면 좋겠다는 소망...쉬이 도달하지는 않겠지만 소망을 품었으니 언젠가 이르는 날도 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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