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형제를 대하는 태도 (마 7:3~5)
40. 형제를 대하는 태도 (마 7:3~5)
  • 주성호
  • 승인 2018.10.01 0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형제란 누구이며 어떤 사이인가? 형제란 육적으로는 한 부모 아래 있는 자녀들의 관계로, 부모를 제외하고는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제를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입장에서는 종족을 초월하여 형제자매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형제 됨은 예수의 피로 인한 사랑의 결과이다. 바울은 골 1:2에서 "성도들 곧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보편적인 생활방법은 자기의 허물보다 남의 허물을 보기 좋아하고 자기의 잘못보다는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사람의 근성이기도 하지만,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약점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의 티보다 네 눈 속의 들보를 의식하고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부터 빼어라 그리하면 네 눈이 밝아져 남의 눈 속에 티도 빼줄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첫째: 형제에 대한 잘못된 태도(3~4절)

1)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

본문은 당시 아랍인과 유대인들 간에 잘 알려진 격언적인 교훈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큰 과실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작은 과실을 보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므로 주신 책망이다. 본문의 티를 흔히 먼지라고 생각하지만 헬라어의 티(karfo")는 나무 조각, 가시 등과 같은 작은 입자를 가리킨다. 외식하는 자나 도덕적 판단력이 없는 자들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능력도 없으면서 주제넘게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고 잘못을 판단하는 우를 범한다. 형제 의식이 없고 사랑의 마음이 결핍될 때 남의 작은 허물을 쉽게 보게 된다.

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들보가 과연 눈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동양 과장법의 표현이다.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한 것과 같다. 들보(dokon)는 집을 받쳐주는 큰 통나무로 눈 속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과장법을 쓰신 목적은 자기는 의식하지 않고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기 위함인데, 티와 들보를 대조시켜 작은 죄와 큰 죄를 상징적으로 비교했다. 남의 약점을 보기를 좋아하고 책망하기를 좋아하지만, 실상 너는 몹시 큰 죄를 지닌 채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냐는 지적인 것이다. 자기 눈 속의 들보를 지닌 채, 예수의 책망도 듣지 않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면 우매한 짓을 통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둘째: 고쳐야 할 잘못 (5절)

1)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은 쉽게 보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므로, 예수께서는 자기 비판에 엄격하라는 뜻으로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부터 빼라고 하셨다. 보편적으로 외식하는 자들은 가기의 잘못을 알 리가 없고 보지도 못한다. 고리대금업자들이 남을 착취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기를 너무도 모르고 남의 허물만 보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부터 빼야 비로소 남의 눈 속의 티를 빼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빼는가?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의식해야 한다. 의식하는 방법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 겸손히 부복한 자세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사람인가를 보게 된다. 마치 거울에 모습 보듯. 누구나 자기 눈 속의 들보를 의식한다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급한 마음으로 빼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눈 속의 들보를 빼는 방법은 간단하다. 회개하는 순간 온전히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2) 밝히 보게 됨

밝히 보고(diablepw)는 꿰뚫어 보다, 통찰하다라는 뜻으로 시력을 회복하다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했다(막 8:25). 막 8:22~25를 보면, 예수께서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소경을 데리고 나와 손대주기를 바랐을 때 그에게 안수기도하고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니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자 재차 안수기도 하므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 이것은 소경이 예수의 은혜로 치유 받아 어두웠던 그의 눈이 보게 되었다는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보면 누구보다 더 자기가 더 큰 죄인임을 의식하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 자기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남의 눈 속의 티까지 보게 되지만 일단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뺄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일단 눈 속의 들보를 빼면 시력을 회복하게 되고 남의 눈 속의 티를 보고 뽑아 줄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충고하거나 빛으로 인도할 자격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일 자기 눈 속에 들보를 그냥 놔둔 채 남의 눈 속에 티를 빼려 한다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억지로 뽑아주려 하다가는 오히려 남의 눈에 상처만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남의 티 같은 작은 허물을 보기보다는 자기에게는 들보와 같은 큰 허물이 있음을 의식하고, 먼저 자기의 들보를 먼저 제거하고 난 후에, 남의 허물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권면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더러운 손으로 얼룩을 지우려 한다면 더욱 큰 얼룩만 남긴다. 밝히 볼 수 있는 눈으로 남의 눈 속의 티도 빼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